오랜만에 창문을 열었다. 새소리가 들린다. 봄기운에 겨워 우는 것일 텐데, 마치 겨우내 저리 운 것을 창문을 열어서야 비로소 듣게 된 것 같다. 찌뺏종찌뺏종, 청량한 소리에 몸속까지 환기 되는 느낌이다.
삐이익, 삑. 삐이익. 새소리가 아니다. 무인경비시스템의 경보소리다. 집으로 누군가 침입했음을 알리는. 물론 침입자는 없다. 새가 어디 있나 보려고, 창밖으로 머리를 내민 때문이다. 기억력 없는 거주자가 경비시스템이 작동 중인 상태에서 또 창밖으로 머리를 내민 것이다. 올해 들어서는 처음이지만, 작년 여름 설치한 이래 수차례 이어져 온 실수다.
집에 도둑이 든 것이 그맘때였다. 자고 일어났는데, 아침 햇살에 거실 바닥에 찍힌 신발자국이 드러났다. 처음부터 도둑이 들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식구 중 누군가 집을 나서려다, 급한 마음에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발 크기가 사뭇 달랐다. 빛의 각도에 따라 몸을 낮추고 보니 베란다 창으로부터 시작된 발자국이 안방으로, 또 다른 방으로 이어졌다. 도둑이 든 것이다.
그런데 집안에는 발자국 외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부피가 큰 TV, 오디오는 그렇다 쳐도 노트북이며 카메라가 제자리에 고스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침입한 것만은 분명해보여 신고를 했다. 경찰이 출동했고, 족적을 사진에 담았다. 경찰로부터 동네에 상습적으로 다니는 도둑이 있는데 그 신발자국에 6각형문양이 있어 '육각형'으로 불린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렇게 선명한 족적은 처음이라는 감탄을 들었다. 전날 비가 온 덕분이었다. 비오는 날 사람들의 시야가 우산 속에 갇히기 때문에, 빈집털이범들의 활동이 더 잦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러자 도둑의 형상이 구체화되면서, 등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경찰은 마지막으로, 없어진 물건이 없으니 인기척을 느끼고 되돌아나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럼 집안에 사람이 번연히 있는 동안에 다녀갔다는 것인가. 등이 더 서늘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이틀 후, 집이 빈 동안 도둑이 다녀갔음이 분명해졌다. 오랜만에 귀걸이를 하려고 함을 열었더니, 도금한 액세서리부터 혼수, 학교졸업반지까지 금이란 금은,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모조리 없어졌다. 크게 값나가는 물건들은 아닐지라도, 하나하나 사연과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경찰에 다시 연락을 했고, 없어진 물건들의 그림까지 그려 절취물 목록을 작성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지만 되찾을 확률은 없어보였다.
그런데, 도둑이 훔쳐간 것은 귀금속만이 아니었다. 여름 내 모기장창 하나만 닫고 창문을 연 채 잠들었었다. 비오면 빗소리 듣는다고 열어두고, 집을 비울 때도 집안에 화초들을 위해 창문 틈을 벌여두고 외출했었다. 2층이라, 나 같은 사람 눈에는 딱히 발 디딜 곳도 없고, 도무지 사람이 타고 올라올 높이가 아니었다. 안심했다기보다, 의심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는 잠잘 때나 외출할 때 창문을 꼭꼭 잠그는 것은 물론이고, 집에 있을 때조차 문을 닫아걸어야 안심이 됐다. 환기가 안 되니, 화초들이 시들해졌다. 산이 가까워 한 여름에도 창문만 열면 에어컨을 켤 필요가 없다는 게 자랑이었는데, 복더위에 문을 닫고 살자니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위보다 두려움이 더 커서 여름을 쩔쩔매다가, 결국 무인경비시스템을 설치했다.
침입자를 막겠다고 집을 빙 둘러친 이 '금줄' 안에, 이제는 갇혀서 산다.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존 쿠시의 소설 <추락> 의 평범한 한 구절도 절절하다. '삶이 예전과 같지 않다'. 추락>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의 질은 어쩌면 이런 작은 신뢰들에 의해 결정되는 지도 모른다. 창문을 열고 지내는 것, 골목에서 우산을 쓰고 마주 오는 행인을 선량한 이웃이라고 믿는 것 같은. 잃어버린 귀금속보다 더 아깝고, 좀체 되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도둑의 절취물이 바로 그것이다.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