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그는 논쟁적 여성 감독이었다. 93년 첫 다큐멘터리영화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으로 동아시아의 매춘 실태를 고발했고, '낮은 목소리' 3부작 시리즈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모았다. 변영주 감독은 벌집을 헤집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하나의 시대적 아이콘이 됐다. 2002년 장편 극영화 '밀애'를 만들면서 이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2004년 '발레교습소'가 "망하면서" 그는 서서히 잊혀졌다. 그런 그가 8년 만의 복귀작 '화차'로 영화인생 반전에 성공했다.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밑그림 삼은 '화차'는 지난 주말까지 212만4,043명이 찾아 변 감독의 첫 흥행작이 됐다. 부모가 물려준 사채의 구렁텅이를 벗어나기 위해 살인을 불사하고 신분 세탁을 서슴지 않은 여인 경선(김민희)의 기구한 사연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난 23일 만난 변 감독은 "상상하지도 못한 흥행 결과"라며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빚에 눌린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 같다.
"욕망으로 인해 모든 것을 저당 잡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20세기엔 피해 여성이 포주 등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이야기의 끝이 났다. 그런데 '화차'는 자기와 똑 같은 피해를 입은 여자에게 접근해서 죽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훨씬 더 비정하다. 이런 내용이 요즘 세상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 생각했다."
-어두운 내용인데 대중적 성공을 어느 정도 예측했나.
"예전에 내 영화를 가져가면 한숨을 쉬던 편집기사가 재미있어 하더라. 자체 시사를 마쳤을 때 배우와 스태프들이 좋아했다. 아! 적어도 관객들이 미워하진 않겠구나 생각 했다. 사실 (김)민희 덕을 봤다. 관객들이 여배우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전도연 같은 배우가 (극장가에) 안 보이는 상황에서 김민희가 확 나와서 터트려 주니 좋아하는 것 같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상업영화를 만들면서도 영화에 담긴 주제를 전면화시키는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연출 방식을 따랐다. (스릴러) 장르 형식을 지닌 '화차'는 겉 이야기만으로도 사람들을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예전엔 자꾸만 숲을 보여주려 애썼다면 이번 작품은 나무를 한번 제대로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난 앞으로 이런 류의 영화를 할 것이다. 장르에 기대 속삭이듯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8년이란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책 보고, 드라마 영화 게임 즐기며 2년을 그냥 보냈다. 다행히 말주변이 좋아 방송으로 먹고 살 순 있었다. '화차'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3년이 많이 힘들었다. 시나리오를 스무 번 고쳐 썼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엔 '올해도 못 만드는 구나'라며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곤 했다. 그래도 자기연민엔 휩싸이지 않았다.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은 재미가 있었으니까."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나.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 이상 매혹적인 대상이 나타나면 모를까. 상업적으로나 평단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극영화만을 했으니까 후회는 없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땐 지지자의 70%가 영화를 보지도 않고 훌륭한 일 한다고 했다. '화차'의 경우 돈이 아깝다 하거나 좋다는 반응은 모두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온 것이다. 그래서 많이 즐겁다."
-예전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여성의 위치는 어떤가.
"다큐멘터리를 만들 땐 여성들의 동질감이 중요시되던 시기다. 그런데 지금은 성보다 계급적 차이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된 듯하다. 이번 영화도 여자보단 이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재미있는 건 처음으로 여성감독 작품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 동안 관점의 변화가 있었나.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다. 공격적이지 않게 됐다. 누군가 '난 몸매가 섹시한 여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예전엔 '아우 저런 꼴통' 이랬는데 요즘엔 '왜 언제부터 그런 거야' 식으로 궁금해진다. 90년대 난 분명히 당혹스러울 정도로 거칠고 강한 깃발을 들고 있었다. 영화가 망하고 나서부터 변하게 됐다."
-다음 작품 구상은 어떻게 되나.
"내후년 개봉을 염두에 두고 몇 개를 고민 중이다. 조선시대 배경 사극,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등이다. 내가 좋아하고 신나게 여기는 영화를 정교하게 만들면 바깥에 있는 이야기까지 관객들이 해석해주는 듯하다. 관객은 참 영리하다. '건방 떨지 말고 열심히 이야기를 속삭이기만 하자'고 생각한다. 아, 나는 왜 이제야 이걸 알았을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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