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그웨나엘 오브리 지음ㆍ임미경 옮김/열린책들 발행ㆍ232쪽ㆍ9,800원
명민한 법학교수에서 중증의 우울증 환자로 전락해 정신병원을 드나들다 삶을 마감한 아버지. 그는 병원에서 나와 작은 아파트에서 보낸 생의 마지막 9개월 동안 필사적으로 자전적 기록을 남긴다. '우울증에 걸린 검은 양'이란 제목의 이 글엔 '소설로 쓸 것'이란 당부의 메모가 첨부됐다.
전처소생인 소설가 딸이 아버지의 유언에 응한다. 그녀가 어릴 적 이혼해서 가정을 떠났고 이후에는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살았기에 부재하는 것과 다름없던 아버지. "흩뿌려진 파편 부스러기들과 돌조각, 폐허의 잔해와 보석 원석들" 같은 유고를 그녀는 "내 단어들과 함께 엮어서 짜 내려간다."(20쪽) 스스로 "텅 빔을 건축하고 부재를 조각"(21쪽)하는 일에 비유한 이 작업은 유령과 다름없는 존재였던 아버지에게 언어의 육체를 선물하는 일이다.
프랑스 소설가 그웨나엘 오브리(41ㆍ사진)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이 장편은 딸이 부친의 유고에 단 주석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26장으로 구성됐으며 각 장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ㆍ프랑스 극작가)'부터 '젤리그'(Zeligㆍ우디 앨런 영화 제목)까지, 알파벳 26자를 각각 머릿글자로 하는 프랑스어 단어를 소제목으로 삼는다. 이들 단어는 아버지의 내면에 분열적으로 자리했던 정체성, 다시 말해 아버지가 끊임없이 바꿔 썼던 페르소나(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의 이름이다. 또한 "아버지라는, 그리기 불가능한 초상"(218쪽)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26종의 '앵글'이다.
예컨대 본드(Bond). "아버지는 제임스 본드이고 싶어 했다. 제임스 본드가 된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 자신을 감춘다는 의미였다."(24쪽) 경찰(Flic). "아버지는 배지와 훈장, 단체 조직을 좋아했다. 자아의 분산된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자신을 기관에 소속시키려 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패밀리에 속해 있기를 꿈꾸었다."(81쪽)
유고와 옛 기억을 그러모아 작성한 '가면들의 출석부'를 불러보지만, 딸은 끝내 아버지의 실체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만 "아버지는 척하는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닐까"(44쪽) 라고 짐작해본다. "(복잡한) 문제들은 언제나 침묵 속에, 신중함 속에 묻어 놓아야 마땅한 척을 할 수 없"었기에 어떤 페르소나에도 머물지 못하고 방황했으리라고. 그녀는 아버지가 사후 세계에서라도 "그 누군가가 되지 않을 권리"(219쪽)를 쟁취하길 기원한다. 농밀한 문장과 독창적 구성, 철학 박사인 작가의 깊은 사유로 범상치 않은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공쿠르상과 더불어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페미나상의 2009년 수상작.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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