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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폭력이라는 윤리적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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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폭력이라는 윤리적 쟁점

입력
2012.03.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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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가장 격퇴하여야 할 윤리적인 악이 있다면 누구나 주저 없이 '폭력'을 꼽을 것이다. 폭력은 거의 아무런 유보 없이 무조건적으로 힐난 받아 마땅한 악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실은 조금만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면, 이보다 그 어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만장일치로 최고의 악으로 선출된 것도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주저 없는 폭력 규탄에 동참하기를 주저할라치면, 대뜸 "그렇다면 너는 그 폭력을 용인하자는 말이냐"는 노기등등한 추궁을 듣기 일쑤이다. 그럼 어쩌다 폭력은 우리 시대에 대표적인 악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실은 우리는 사회의 모든 문제를 폭력의 문제로 전환하는데 아주 익숙해 있다. 학교폭력, 성폭력, 직장폭력 운운으로 이어지는 모든 폭력들은 실은 폭력 자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그것이 가리키는 사회, 이를테면 학교, 직장, 성관계 등에 스며있는 진짜 문제를 폭력이란 문제로 전환한다. 따라서 폭력은 문제이기에 앞서 실은 문제 자체에 눈멀게 하는 윤리적인 미끼 혹은 장막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직장 내의 성차별은 두루 알려진 일이다. 그렇지만 그 차별을 차별로 체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자라고 더 주지 말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라 요구하는 것은 공허한 추상적 주장처럼 들린다. 그런 주장은 듣는 이들의 심금을 거의 울리지 않는다. 반면에 누군가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불에 덴 듯이 분개한다. 아마 윤리란 말의 의미를 새긴다면 그것은 이런 상태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윤리란 어떤 문제를 그와 관련 맺고 있는 사람의 죄책감에 호소할 수 있는 쟁점으로 바꿔내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윤리란 차별, 불평등과 같은 문제가 더 이상 우리가 해결할 수 있고 또 해결해야 할 문제로 체험될 수 없을 때 등장한다. 문제는 어쨌든 그것을 겪는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고통이란 것은 실은 애매하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다. 그것은 어떻게든 관심을 가질 만한 것으로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혹은 그를 방관하는 이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무엇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그런 일을 도모하는 것을 저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저항이란 것이 생겨날 수 없을 때, 고통을 안겨주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윤리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저항이라는 정치가 생겨날 수 없는 곳에서 우리는 그것을 대신할 방법으로서 윤리를 찾는다. 윤리란 단적으로 말해 SOS 신호이다. 그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는 최소한의 절박한 몸짓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한 시도를 가로막는 허울이기도 하다. 저항 대신에 윤리인 것이다. 그 탓에 폭력 비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폭력은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암시는 전과 달리 대관절 무엇이 그런 폭력을 낳았을까를 명시하려는 노력을 저지한다.

그러므로 폭력이 그 자체로 비판할 것이 되었을 때, 실은 우리가 겪는 변화는 역설적이게도 문제 자체가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자인하는, 즉 저항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무력하게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정이 그 정도에서 그친다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다. 그런 저항 없는 윤리적 심판은 터무니없는 후유증을 남긴다. 폭력 비판은 역설적으로 지하에서 스멀거리는 폭력의 향연을 낳는다. 커피숍에 앉아있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어 마디마다 "존나게"를 연발하는 10대 여학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물론 폭력 비판이 어떻게 은밀하게 폭력을 분비하는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열심히 성폭력을 규탄할 때 동시대에 가장 유행하는 자위방식이 자신의 신체를 상처 내며 느끼는 폭력적인 쾌감이라는 어떤 통계처럼 말이다. 폭력 비판은 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들의 내면화된 폭력을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폭력을 해결할 것인가. 당연히 폭력이 아니라 폭력이 절망적으로 가리키는 그 내부의 더한 폭력을 탐색하는 일이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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