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사고 이후 평범하고 평화로웠던 마을이 폐허가 됐어요. 원전의 위험성과 주민들의 아픔을 이웃 한국인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22일 오전 서강대 다산관에서 반핵아시아포럼 주최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 대응 국제포럼’에 낯익은 남성 한명이 보였다.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피해자 하세가와 겐이치(59)씨다. 지난해 3월 원전 사고 때 이타테무라 마에다 마을이 대표적인 원전 피해지역으로 주목 받으면서 하세가와씨는 인터뷰 대상자로 자주 언론을 탔다. 마에다 마을의 이장인 이유도 작용했다.
원전 피해자들과 함께 방한한 그는 이날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원전 사고 라는 ‘괴물’은 마을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며 “주체하기 힘든 슬픔과 아픔을 한국인들에게 전하고 위로도 받고 싶었다”고 했다.
마에다 마을은 후쿠시마현 북동부 해발 1,000m에 위치한 산촌. 54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은 일본에서도 꽤 알려진 청정지역이다. 유기농 채소와 질 좋은 쇠고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마을이 망가진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고 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과 겨우 45km 정도 떨어진 마을은 사고 후 ‘계획 피난 구역’으로 지정됐다. 산과 농지에서 대량의 풀루토늄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방사능 오염으로 35년 동안 키우던 소 50마리를 도축해야 했을 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어요. 자식 같은 소가 도축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이런 일이 생겨도 되나’는 생각만 들더군요.”
회복 불능 상태로 하릴없이 황폐화되는 마을을 보면서 낙심만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피해지역들은 전 가구가 이사 했지만 우리 마을은 23가구가 마을에 남았지요. 임시 주택에서 살면서 마을을 복구하고 재기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였다. 상심한 주민 한 명이 자살하면서 분위기는 극도로 악화했다. “자살한 주민은 벽에 ‘핵발전소만 없었다면...’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어요. 정부 보상도 없고 더 이상 낙농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린 자식들을 남겨둔 채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죠.”
원전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절망감에 빠져있던 차에 예상치 않은 제안 하나를 받았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반핵아시아포럼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사토 다이스케씨가 “한국의 반원전운동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당장 생활을 꾸리기도 버겁지만 나와 가족, 우리 주민들이 겪은 고통과 충격이 지구상에 다시는 되풀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흔쾌히 동의했어요. 후쿠시마와 같은 상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 그 고통을 직접 체험한 저의 소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한 뒤 19일부터 나흘 동안 국내 반원전단체들과 함께 강원 삼척, 경북 영덕, 부산 등지를 다니며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연설을 했다.
“청정 동해 바다를 보면서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현지 어부들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평범한 사람들의 터전을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는 원전의 폐해를 정확히 알리는데 앞장 설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던 그는 한마디를 보탰다. “핵을 너무 복잡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2011년 3월 11일, 나와 가족이 만약 후쿠시마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질문 스스로 던져보세요.”
글ㆍ사진=손효숙기자 sh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