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몸통'이라고 자처하고 나선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이 사건이 청와대 민정수석실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속속 드러나는 정황은 그 반대다. 거꾸로 이씨가 감당할 자신도 없이 벌려놓은 사건을 민정수석실이 뒤처리해 준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이 즐비하다.
21일 한 인터넷 언론이 공개한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과 류충렬 전 공직복무관리관, 최종석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 사이의 대화 녹취록을 보면 이 사건의 배후로 민정수석실이 거론된다.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된 장씨의 항소심 선고를 한 달 앞 둔 지난해 3월 최씨는 장씨에게 "민정(수석실)에서 얘기도 그렇고 자네는 최대한 벌금형 정도, 진경락(공직윤리지원관실 과장)은 일단 집행유예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최씨의 지시로 공직윤리지원관실 자료를 삭제한 장씨가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벌금형으로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것으로, 민정수석실도 이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또 최씨는 "민정에서 나오는 얘기로는 재판기록 검토 다 끝났고 … 안 그래도 어제 민정 쪽하고도 계속 모니터링하고 그랬다"고 말했다. 장씨 문제를 놓고 민정수석실로부터 정보를 제공받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장씨가 청와대 개입을 폭로하는 등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민정수석실을 거론해 안심시켜려는 최씨의 허언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불법사찰 혐의로 기소된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의 후임인 류씨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보면 이들이 민정수석실을 거론한 것은 단순한 입막음용 카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녹취록에 따르면 류씨는 장씨에게 "지금까지 전달받기로는 (벌금형이) 상당히 희망적이다.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전달'의 주체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씨가 "지난해 4월 류씨로부터 '장석명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이 마련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5,000만원을 받았다"고 폭로한 것을 보면 그 주체가 민정수석실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2010년 검찰의 불법사찰 사건 수사 당시 증거인멸의 직접 지시자는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차후 이를 수습한 주체는 민정수석실인 셈이다. 적어도 민정수석실은 증거인멸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한 사실을 나중에라도 알게 됐고, 이를 숨기려 했다는 의혹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정치권도 최근 불법사찰의 또 다른 몸통으로 민정수석실을 거론하고 있어, 검찰의 재수사는 민정수석실로 향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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