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인천 옹진군 연평면 연평초등학교. 5톤 트럭 32대가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곧이어 옅은 갈색의 외벽에 붉은색 지붕을 얹은 ‘집’들이 트럭에 한 채씩 실려 차례로 마을을 빠져나갔다.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1년 간 머무른 ‘정든 집’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주민 박종만(53)씨는 “포격으로 반파된 집을 수리하는 동안 저 집들 덕분에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살 수 있었다”며 “고마운 마음 뿐”이라고 했다.
이날 경기 파주 재해구호물류센터로 돌아간 이 집들은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주민 80여명의 보금자리로 쓰였던 임시주거지였다. 18㎡ 크기의 조립식 판넬 건물로 화장실과 주방을 갖췄다.
현장 책임자로 이날 임시주택 철거 작업을 지휘한 김삼렬(37) 전국재해구호협회 구호과장은 만감이 교차한 표정이었다. “연평도에 임시주택을 설치할 때 ‘아무도 없는데 집은 지어서 뭐하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그 때마다 ‘언젠가 한 명이라도 돌아왔을 때 이 집이 따뜻한 보금자리가 될 수 있지 않겠냐’고 대답했죠. 임무를 끝내고 떠나는 집들을 보니 뿌듯합니다.”
그는 2010년 11월 24일 트럭 10대, 기술인력 30명과 함께 임시주택 제작을 목적으로 연평도로 향했다. 연평도 포격 다음날이었다. 김 과장보다 먼저 연평도에 도착한 사람들은 소방관들뿐이었다. 그 때부터 일주일 간 주민들이 다 떠난 텅 빈 마을에서 임시주택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빵과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면사무소 의자나 차 안에서 쪽잠을 자며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지금은 뜨내기들은 절대 모르는 음식점을 찾아갈 만큼 연평도에 익숙해졌지만, 그땐 북한군이 민간인을 상대로 한 공격이라는 게 전례가 없다 보니 재해 매뉴얼도 없고 우왕좌왕했다”고 회상했다.
이 후 39동의 임시주택을 설치할 때까지 김 과장은 연평도를 10여 차례 더 드나들었다. “순간순간 힘들 때가 많았죠. 어떤 재난 현장을 가든 주민들끼리 싸우는 모습은 꼭 목격해요. 그만큼 다들 예민해져 있으니 좋은 의도로 도우려 해도 욕 먹을 때가 많고요. 그래도 누군가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고생한다’며 타 주는 커피 한 잔에 힘내서 일하는 겁니다.”
2003년 재해구호협회에 입사한 그는 10년 간 전국 수십 곳의 재해 현장을 누볐다. 그는 “어떤 큰 뜻을 품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세 차례 사법시험 낙방 후 ‘일단 취직하자’는 생각에 이력서를 넣다 합격 통보를 받은 곳이 재해구호협회였다. 하지만 취직 이후에도 고민은 계속됐다. 박봉과 오랜 기간 꿈꿔 온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상실감은 여전히 그를 힘들게 했다. 그 때 태풍 매미로 인한 수해 현장에 투입되면서 마음가짐이 180도 바뀌었다. “현장에 나가면서 이 일을 평생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어요. 남들은 자기 시간을 억지로 내서 봉사활동을 하는데 저는 월급을 받으면서 봉사를 하니까 이젠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그는 ‘부업’으로도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5년 전부터 살레시오청소년센터에서 감호 위탁 중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 봉사를 하고 있다. ‘본업’인 재해구호협회를 통해선 전국을 돌며 도배나 장판, 전등 교체 등 집수리를 돕는 ‘집수리 로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고, 4월엔 연평도에 남은 7동의 임시주택을 마저 철거하는 게 올해 봉사 일정의 큰 그림이다. “제가 하는 일련의 활동들이 계층 간 빈부격차를 완화시키고 사회갈등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좀 더 많은 기업과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까지 사명감을 갖고 앞장 설 겁니다.”
연평도=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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