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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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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입력
2012.03.1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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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아함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연기법을 설명하는 이 단순한 문장은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것이 없어짐으로 저것이 없어진다. 저것이 없어짐으로 이것이 없어진다."

조건에 의한 발생과 소멸을 얘기하는 이 문장은 관계와 인과가 작용하는 한 영원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리학에서는 이것의 존재와 쌍을 이루는 저것의 존재를 상정한다. 예를 들면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입자는 6개의 쿼크와 6개의 렙톤으로 이루어져 서로 쌍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론 물리학자들은 대칭성을 찾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1977년 바텀쿼크를 찾아낸 물리학자들은 반드시 탑쿼크도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18년 후 탑쿼크가 발견 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런 예는 또 있다. 광자를 쪼개어 두 개의 입자를 만들면, 이 두 입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영향을 받는다. 한 입자에 시계방향으로 스핀을 걸면 다른 입자도 거기에 영향을 받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1935년에 제안했지만(아인슈타인은 그런 일은 일어 날 수 없다고 믿었다), 80년대초에 증명된 아스펙의 EPR 실험은 관찰대상인 자연과 관찰하는 인간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하나'라는 것의 의미는 기묘하게도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정보라는 것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시공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당연히 물체가 이동하는 궤도라는 것도 필요없다. 신기하게도 여기에서 저기로 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여기에서 이렇게 되었음으로 저기에서 그렇게 된다.

이 실험은 풍수지리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를 설명해 주고 있다. 바로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이다. 이 이론에 대한 가장 흔한 설명중에 하나가 조상의 뼈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동기감응론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정약용은 "살아있는 부모가 자식의 손을 잡고 타일러도 어긋나기 쉬운데 하물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산 자식들에게 복을 줄 수 있단 말인가"하고 반박했고, 홍대용도 "옥에 갇힌 죄수가 고초를 당하고 있어도 그 자식들이 아비가 당하는 고초 때문에 악질이 들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조상의 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제사의 의미는 원시반본(原始返本)에 있다. 내가 어디서 왔나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상의 뼈'는 말 그대로 물질인 뼈가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아버지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슬러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모든 것에 연결 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대기와 땅의 자손이고, 별의 아들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 감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동기감응설의 진의다.

한무제 때 미앙궁에 있는 종이 스스로 울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무제는 동방삭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동방삭은 서촉에 있는 구리광산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미앙궁의 동종은 서촉의 광산에서 캐온 구리로 주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무제는 이것을 확인했고, 과연 서촉의 광산이 무너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제가 감탄하여 말했다. "이와 같이 미천한 물질도 서로 감응을 일으키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조상과 후손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감응을 일으킬 것인가."

문제는 미천한 물질이 아니라는 데 있다. 지금 우리 옆에 있는 돌 하나, 풀 한 포기, 흐르는 강과 산과, 나는, 모두 한 쌍이라는 데 있다. 풍수지리는 우주의 이 정밀한 대칭성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명당은 정해진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나의 느낌에 일어나는 곳에 있다. 그 느낌 속에서 나와 우주의 동일성을 눈치 채는 사소한 생태적 자각이 바로 풍수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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