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관한 한 오만에 가까운 자부심을 품고 사는 존재가 작가일 텐데, 이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공개석상에서 특정 작가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밝히는 광경은 낯설고도 진기하다. 15일 오후 서울 서교동의 작은 카페 커먼(common)에서 열린 문학 행사 '키냐르를 읽는 밤'이 그랬다.
파스칼 키냐르(64). 깊은 사유, 시적인 미문으로 <은밀한 생> <떠도는 그림자> (2002년 공쿠르상 수상작) 등 소설과 에세이의 벽을 허무는 개성적 작품들을 발표해온 프랑스 작가다. 이날 사회를 맡은 문학평론가 이광호씨는 키냐르가 '작가들의 작가'로 등극한 이유로 "평균적 수준을 넘어서 마니아적 감수성에 호소하는 고급 작가이고,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장르별 형식을 완강히 제약하는 한국문학 풍토에 숨통을 틔워준다"는 점을 들었다. 떠도는> 은밀한>
키냐르의 신작 소설 <빌라 아말리아> 출간에 맞춰 문학과지성사가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시인 김소연 김언, 소설가 한강 정용준, 연극평론가 안치운씨와 키냐르 작품을 번역한 송의경 류재화씨가 나와 키냐르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의 작품을 낭독했다. 100명가량의 관객 중에도 시인 강정 신해욱, 소설가 이신조 김선재씨 등 작가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빌라>
첫 순서로 안치운씨는 키냐르의 <옛날에 대하여> 중 세 군데를 낭독했는데, "내 삶의 지표와 같은 문장"이라고 밝힌 마지막 구절은 두 번 반복해 읽었다. "무심하게, 이미 세상을 떠난 누군가가 이곳을 몹시 그리워할 때의 그런 초연함으로, 나는 사람들과 조우하며 세상을 살아간다는 기분이 든다." 옛날에>
김소연 시인은 "사실 키냐르를 좋아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프랑스 주요 문학상을 휩쓴 작품성, 그에 버금가는 음악적 재능, 은둔 작가의 신비한 아우라에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여러 언어를 쓰는 부모 때문에 자폐증을 앓은" 신화까지, 그가 갖춘 것들에 대한 부러움을 짓궂게 표현한 것. 김언 시인은 "키냐르의 책을 많이 챙겨봤지만 완독한 작품은 많지 않았다"며 "여러 번이라도 읽을 때마다 영감을 주는 문장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번역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검정색 면티에 블랙진, 검은 신발을 고수하는 키냐르의 복장에 맞춘 것. 송의경씨는 "키냐르를 처음 인터뷰하러 그의 은신처를 찾았을 때 그의 첫마디가 '문학을 하는 분이니까 저를 속이지는 않으시겠죠'였다"며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해도 내 눈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류재화씨는 "(원작 그대로) 옮길 수 없어 잃어버리는 것이 번역자의 불가피한 운명일 텐데, 좋은 작가일수록 그런 고통이 더하다"는 말로 키냐르 번역의 어려움을 표현했다.
한강씨는 "몇 년 전 서사의 작위성을 견딜 수 없어 장편 집필을 중단하고 '서사 같지 않은 소설'을 찾아 읽을 당시 보르헤스, 칼비노의 후기 작품과 함께 키냐르가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정용준씨는 국내에서 가장 널리 읽힌 키냐르의 <은밀한 생> 의 한 대목을 낭독했다. "사랑은 성욕과도 결혼과도 대립된다. 사랑은 도둑질에 속하지 사회적 교환에 속하지 않는다." 은밀한>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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