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무버/피터 언더우드 지음/황금사자 발행ㆍ280쪽ㆍ1만4000원
"10년 전만 해도 삼성이 소니를 제칠 거라는 소리를 과연 몇 사람이 믿었나요? 하지만 지금 삼성의 경쟁자는 소니가 아닙니다. 애플입니다."
흔하게 듣는 이야기고, 실제 현실이 그렇다고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피터 언더우드(57)씨의 이 한 마디에 미래 한국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는 언더우드는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우고 대대로 한국인으로 살아온 그 유명한 선교사 언더우드 가문의 4대손 '원한석'이다.
수년 전 연세대 교수였던 맏형 '원한광'이 한국을 떠날 때 '100년 뿌리를 가진 언더우드 가문이 한국을 떠난다'는 보도가 일제히 나왔던 걸 불쾌하게 생각하는(실제로 이 보도 뒤에 "당신 진짜 언더우드 후손이냐"는 질문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책을 냈다. 이건희가 말해 삼성의 전략이 됐고, 안철수가 청년들을 향해 강조한 <퍼스트 무버(first mover)> 가 책 제목이다. 시장에서든 인생에서든 남 따라가지 말고 남이 안 하던 것을 찾아 선도해 나가라는 뜻이다. 퍼스트>
생후 3개월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와서 외국인학교이지만 고등학교까지 한국서 마치고 대학, 대학원 공부를 위한 미국 생활과 일로 4년 일본에서 생활한 것을 제외하면 줄곧 한국에서 살아온 그는 자신을 '뿌리가 한국에 있는 서양인'이라고 말한다. 사고 방식은 서양식이지만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일 정도로 한국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데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국의 투자환경 등을 조언하는 일을 해왔으니 그동안 '대한민국'을 향해 해주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쓴소리, 단소리 가득한 이 책이 사실상 처음이다.
제목이 요약해서 잘 말해주듯 이 책에서 그는 남이 해놓은 것을 빨리, 열심히 따라가는 '패스트 팔로어'로는 한국의 미래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것으로 '한강의 기적'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미래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선진국들과 함께 누가 세상을 뒤바꿀 새로운 넘버 1 제품을 개발하느냐를 놓고 겨뤄야 할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깨 으쓱할 칭찬처럼 들리는가. 무서운 이야기다. 만년 남 뒤만 따라가면서 성실함 하나로 버텨온 사람에게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그것도 대중이 감탄해마지 않을 물건을 만들어내라는 주문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실패한다면 미래가 없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한국을 지칭해 '우리나라'라고 쓰고, 한국인을 '우리'라고 표현하는 언더우드씨는 한국은 그걸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지금으로는 안 된다. '패스트 팔로어' 체질과 문화를 싹 버려야 한다.
그가 제시하는 폐기 처분 리스트 첫 목록은 한국의 교육이다. 하나의 정답만을 찾도록 하고 점수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그래서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창의력'을 길러야 한다. 한국의 '교육열'은 너무도 인상적이지만 '교육 시스템'은 버려야 할 것 투성이다. 상명하달의 권위주의 문화도 버려야 한다.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정답이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나갈 때 필요한 것은 군사독재의 잔재인 '돌격문화'가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과 실패에서 배우는 '집단지성'이다. 고작 1, 2%의 지분을 가진 몇몇 사람이 회사를 좌우하는 재벌 시스템으로는 결코 유능한 경영자가 나올 수 없다. 주주자본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그의 주문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공동체 문화, 혼혈에 대한 거부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생생한 사례와 함께 거침 없이 전개되고 있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향후 미국과 함께 세계의 쌍두마차를 이룰 지역으로 아시아를 꼽고 그 가운데서도 중국이나 인도, 일본에 주목한다고 소개한 뒤 그는 "이런 예측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본은 "일찌감치 개방을 포기했고 유연성이 떨어져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는 문화가 아니"며 중국과 인도는 '사이즈'를 걷고 본다면 민주주의나 사회의 일체감면에서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나라다.
그는 오히려 한국에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한국이 미국에 맞먹을 정도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갖게 될 거란 소리가 아니다. "창의력의 허브, 혁신의 허브, 성취의 허브, 공정함의 허브"가 되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드나들 때 자연스럽게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을 빼놓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인 모두가 "운명을 거는 자세로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사진 제공 황금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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