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보편적인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나라 저마다 고유한 개성과 가치가 있으며, 범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문화관은 14일 프랑스 파리 살 플레옐에서 지휘자 정명훈씨의 주도로 개최된 평양 은하수 관현악단과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합공연에서도 드러났다.
이날 공연은 옹달샘처럼 고여있던 그들만의 문화가 일부지만 서방 세계에 공개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은하수 관현악단의 단독 공연으로 진행된 1부는 '그네 뛰는 처녀'를 비롯해 북한의 전통 민요 가락에 기반한 창작곡들로 구성되었다. 역시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서양 악기와 대등하게 배치된 개량 국악기들의 등장이었다.
북한 개량 국악기의 역사는 남한보다 훨씬 앞섰으며 상당히 진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서양 악기와 조화를 유지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소해금과 장세납의 음색에는 프랑스 관객들 입에서도 절로 찬사가 튀어나왔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문경진이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연주한 뒤 앙코르로 연주한 백호산 편곡의 '닐리리야'도 현대적 감각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명곡이었다. 이와 같은 민족 문화와 서양 음악의 교배는 북한의 시도가 절대적인 폐쇄주의를 고집하는 게 아님을 방증한다.
실제로 문경진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입상한 모스크바 유학파이며, 이날 1부에 지휘자로 나선 리명일과 윤봄주도 오스트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자신들의 문화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타 문화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상당히 진지한 편이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단원과 합동으로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연주한 2부 공연에서 은하수 관현악단은 세계 무대 경험이 없는 탓인지 초반에는 위축된 모습을 보였지만 악장이 거듭될수록 음악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았다. 북측에서 편곡한 '아리랑'을 앙코르로 연주할 때에는 프랑스 단원들을 리드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정치나 이데올로기적 이해 관계가 상대적으로 적은 문화 분야를 통해 서방과 교류하고자 하는 북한의 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북한의 각종 종교 단체들이 경색된 남북 관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방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도시에는 북한 음식점이 명물로 등장하고 있다.
유럽인들의 북한에 대한 태도도 미국이나 한국보다는 우호적이다. 무엇보다 반세기 넘게 지속된 그들만의 고립된 문화에 대한 호기심은 남다르다. 영국과 독일이 이미 자국의 문화원을 평양에 설립했으며 이날 공연장에도 자크 랑 하원의원을 비롯한 수많은 프랑스 정치 문화계 인사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며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반면 한국인 관객은 대부분 북한 인사들이거나 남한 유학생들뿐 정관계 인사나 교민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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