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욕설과 악담, 저주가 도를 넘었다. 원색적이고 저급한 표현들은 지면에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급기야 11일자 노동신문은 이 대통령 사망설까지 보도했다. 험악한 표현을 순화해 옮기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을 사망 소문이 한 입 두 입 거쳐 북한 전역에 사실처럼 짜하게 퍼졌다'는 내용이다.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종의 상호주의일 수도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진짜로 죽기 전에 남한 언론에 의해 여러 번 죽었다. 3대 세습 후계자인 김정은도 벌써 두 번이나 죽었다. 김정일 장례 절차가 끝난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증권가에서 한 번 죽었고, 올해 2월 초 중국의 트위터인 시나 웨이보(微朴)를 통해 김정은 총격 사망 소문이 급속하게 퍼진 일도 있다.
북한의 극악한 욕설 공세는 자신들의'최고 존엄'모독에 대한 보복이다. 지난해 우리 군 예비군 사격장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의 사진을 표적지로 썼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군부대 내무반의 대적구호 관련 사진이 보도된 뒤 비방 수위가 한층 높아졌다. 북한군 병사들이 이 대통령 초상화를 표적지로 삼아 훈련하고 있는 장면을 관변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초상화에 무수한 총탄자국이 난 섬뜩한 사진은 우리 언론에도 보도됐다.
문제는 김정일 사망 조문 논란도 구실이 된 북한의 봉남(封南) 공세가 일과성이 아니라 김정은 체제의 새로운 국가 생존전략의 일환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아버지 김정일 시대에 북한은 제한적 개혁개방정책으로 경제난 및 국제적 고립을 극복하고자 하는 국가 생존전략을 폈다. 한 편에선 남북대화와 북미ㆍ북일 수교를 추진하고, 다른 한 편으론 핵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 개발을 통해 억지력과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게 이 전략의 핵심이었다.
김정일의 이 전략은 실패했다. 김정은의 새 지도부는 그 원인을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서 찾고, 대미관계를 최우선시하는 새 전략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사망 후 3개월이 채 안 돼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북미 2ㆍ29'합의를 도출하고, 대북 영양식품 지원 등 후속조치를 신속하게 취해가는 데서 김정은 체제의 대미 관계개선 열망이 엿보인다. 이용호 북한 6자회담 수석대표는 지난주 뉴욕에서 열린 동북아 평화안보 국제회의에 참석해 '2.29'합의 이행 의지를 밝히며 미국의 적대시 정책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과 6자회담 재개는 그 자체로 북한에는 개방의 의미가 있다. 그 동안 북한에서 대미 위기감 고취는 핵심적인 체제유지 원리였다. 대미관계가 좋아지면 그 대안이 필요하다. 김정은 체제에 미국 및 남한과의 관계를 동시에 개선하는 데 따른 체제 충격과 동요를 관리할 능력이 있을 리 없다. 여기서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우선하고 대신 남한과의 긴장관계 유지, 즉 통미봉남을 전략적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통미봉남이 이런 전략적 의도 하에 전개되고 있다면 이명박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물론 한미관계는 어느 때보다 좋다. 엊그제 워싱턴에서 열린 김성환 외교부장관과 클린턴 미 국무장관 회담은 북한의 이간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재선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에게 북핵 동결은 매우 중요한 외교 성과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북한의 의도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북한의 통미봉남 공세를 뚫으려면 중국의 협력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중국 어선 불법조업, 탈북자 강제북송 갈등에 이어도 문제까지 불거져 한중관계에 갈등의 파고는 높아만 가고 있다. 김정은 체제의 안정을 핵심 국익으로 여기는 중국인 만큼, 오히려 북한의 봉남을 은근히 거들고 나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임기 말 이명박 정부에 너무 어려운 짐이 지워져 있는 것 같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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