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그림자를 읽다/ 질 비알로스키 지음ㆍ김명진 옮김/ 북폴리오 발행ㆍ347쪽ㆍ1만2000원
<너의 그림자를 읽다> 는 한 미국 여성의 가족 이야기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뒤 언니, 여동생과 함께 커 온 저자의 성장기이자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 이야기이다. 개인의 시시콜콜한 사연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에, 그런데 빨려 든다. 한 사람의 죽음을 농밀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열 살 아래였던 스물 한 살 여동생의 갑작스런 자살을 되짚어 가면서 수많은 자살자들이 놓인 극한의 상황과 내면 풍경, 그 가족들의 고통을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인이자 출판사 편집자인 저자의 담박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장도 한몫을 한다. 너의>
킴은 저자의 어머니가 재혼해 낳은 아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킴이 세 살 때 새 아버지는 다른 여자가 생겨 가족을 떠났다. 킴에게 아버지는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였다. 어머니를 졸라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아버지가 떠난 지 10년 뒤. 그 뒤로 한해 몇 차례 아버지를 봤지만 '부친 부재'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한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남자가 나타날 때 가장 생기가 넘쳤다가 그가 떠나면 우울해지기를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경제적 안정감은 없었고 불안과 두려움에 고질적인 편두통까지 안고 있었다. 가계는 이혼수당으로 지탱했고 아이들은 용돈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고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모은 언니들이 대학 진학 등을 위해 하나 둘 집을 떠난 뒤 어린 킴은 엄마와 둘이 집에 남았다.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만나러 파티에 가느라 자주 집을 비웠고 킴은 베이비시터에게 맡겨졌다.
킴이 표나게 절망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우울해하지는 않았지만 커가면서 이 같은 상실감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원치 않은 임신과 낙태를 경험하며 고민이 깊어진 킴은 고등학교를 1학기 남기고 자퇴했다. 그리고 그 무렵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일하던 남자를 만났다. 거칠고 마약 거래 전과까지 있는 이 남자에게 킴은 빨려 들어갔다. 술과 마약 등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던 어느 날 남자는 킴을 떠났고 킴은 집에서 죽음을 선택하고 만다.
저자는 킴과 보냈던 어린 시절을 돌이키는 것은 물론 그가 남긴 일기와 죽음의 현장을 알려주는 경찰 기록들, 그리고 자살에 관한 많은 보고서들과 문학작품(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자살하는 사람은 52명이라고 한다)을 인용해가며 킴이 어떻게 자살에 이르게 됐는지, 일반적인 자살자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책 후반에서 저자와 면담한 심리학자 슈나이드먼이 지적하듯, 킴을 자살로 내몬 '악역'은 아버지였다. 킴은 물론 저자의 자매는 '부친 부재', 그리고 '이성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좌우될 수 있다는 생각 속에' 자랐다. 그 이성은 한때는 아버지였고 또 한때는 자신들이 마음을 준 남자들이었다. 미국자살학협회를 창립한 슈나이드먼은 이런 마음의 문제는 주위의 도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킴이 '20대를 버텨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자살의 고비는 30대, 40대, 50대에라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동생이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결국 자신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안고 써나가면서 저자는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메커니즘이 무엇일까 묻는다. 자살을 생각하는 그 체념의 순간에 초자아가 더 호전적으로 변해 자아가 불안정한 생존을 이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자살의 4분의 1이 자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실행에 옮기는 충동적인 행위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자살을 시도하지만 살고 어떤 사람은 죽는다. 저자의 친구도 열일곱 살 때 남자친구와 다툰 뒤 수면제를 다량 복용해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수면제를 삼킨 뒤 남자친구에게 전화했고 그가 달려와 친구를 살렸다. 킴도 죽은 날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멀리 떠날 것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킴은 유서에 이렇게 썼다. '내가 상처를 주는 거라면 정말 미안해요. 우리 가족 모두를 사랑해요! 정말 많이! 하지만 난 떠날 수밖에 없어요. 외로움에 지쳤어요.' 자살자의 유서는 어쩜 이렇게 닮아 있는 걸까.
킴이 떠난 다음 날 밤 어머니는 빨랫감을 가지러 지하실에 갔다가 킴의 물건들이 든 상자를 들고 올라와 눈물을 터뜨렸다. "이게 그 애가 가졌던 전부야. 우리 불쌍한 아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구나."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자살의 징후가 있다면 24시간 그를 관찰하고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라. 자살로 내몰린 사람들을 돕는 철칙 중 하나다.
미국에서는 매년 3만명이 자살하고 약 50만명이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간다. 한국의 지난해 자살 사망자는 1만5,000명을 넘었다. 10만명 당 자살 인구를 뜻하는 자살률은 32명으로 미국의 3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다. 하루에 4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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