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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2> 강화섬에서 태어나 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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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2> 강화섬에서 태어나 성장하다

입력
2012.03.0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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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1899년 음력 9월 25일, 강화군 선원면에서 농부 조창규(曺昌圭)와 강릉 유씨(江陵 劉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친의 태몽이 심상치 않았다. 봉황이 휘휘 날아와 지붕 위를 선회하고 마니산 정상 바위 위로 날아가는 길몽이었다. 그래서 봉암(鳳岩)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뜻이 너무 강한 듯해 나중에 받들 봉(奉)자를 넣어 고쳤다. 손 위로 다섯 살 된 형 수암(壽岩)과 세 살 된 누나 경암(慶岩)이 있었다.

불확실한 죽산의 출생지

출생한 동리가 어딘지는 알 수 없다. 다섯 살 전후 강화읍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죽산의 자전적 기록인 에는 '나는 강화도 남쪽 원면이라는 촌에서 나서 강화읍에서 자랐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원면이라는 촌락은 강화도에 없다. 죽산의 글을 실은 잡지(, 1957년 2,3,5월호)가 탈자(脫字)했을 가능성이 크다.

선원면 지산리(智山里)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는데 그 마을에 먼 친척이 한 가구 살고 있다는 것 외에 근거가 없어 막연하다. 84세가 된 선생의 따님 조호정 여사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죽산의 수행비서였던 강화 출신 조병선(趙炳璿) 선생은 올해 93세로, 죽산의 죽마고우였던 조광원(趙光元) 성공회 사제의 아들이다. 이분도 죽산의 출생지를 알지 못한다.

필자는 죽산의 가문 족보인 를 펴놓고 가계도를 한번 그려 보았다. 조상들의 묘소 대부분이 금월리(錦月里)로 돼 있다. 지산리는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만든 선원사(禪源寺) 터가 있는 마을이고 금월리는 그 옆 마을이다. 출생지가 두 마을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고 금월리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강화읍사무소 앞에 죽산조봉암선생추모사업회가 세운 '죽산 조봉암 선생 생가 터' 비석이 서 있다. 관청리 591번지, 유년시절에 이사한 곳이며 원적지이다. 그러나 생가 터는 여기가 아니다.

죽산의 외가도 강화였다. 서쪽 해변 외포리에 강릉 유씨 집성촌이 있는데 봉암의 외가는 거기 있었다.

죽산이 소년시절을 보낸 군청 소재지 관청리는 강화궁지와 성문이 있고, 산세가 아름다운 남산과 북산이 앞뒤에 자리잡고 있었다. 남산에서 흘러내린 동락천(東洛川)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내가 군소재지 취락을 관통해 흘렀다. 강화진위대 병영도 있었으며 저자에서는 5일 장이 열렸다.

죽산이 사는 관청리에서 널다리를 밟고 동락천을 건너면 신문리인데 거기 잠두(蠶頭)교회가 있었다. 북감리회 산하의 이 교회는 1900년, 인천 내리교회 존스(G.H. Jones) 목사의 영향 아래 설립된 교회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을 위해 잠두의숙(蠶頭義塾)을 열었다. 죽산의 형 수암과 누나 경암은 납부금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기 다녔다.

이동휘 참령과 구한말 강화 의병봉기

죽산이 다섯 살 때 이동휘(李東輝)가 강화 진위대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강화 사람들의 중망을 온몸에 받았다. 마치 전설 같은 이야기가 강화 섬으로 건너오더니 바람을 타고 퍼지듯이 퍼진 때문이었다.

"함경도 단천 관아 통인(通引)이었는데 군수가 어린 기생에게 추행을 저지르는 걸 보고 격분해서 화로를 들어 군수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탈출했대. 그걸 전해들은 이용익(李容翊) 대감이 거둬서 무관학교에 넣어주었대."

강화에 부임하기 전 보직은 삼남지방 검사관이었다.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암행어사와도 같은 특별임무였다. 무수히 많은 관장들을 파직시키고 참령으로 승진해 강화로 온 것이었다. 그는 군대를 지휘하며 육영(育英)학교(뒷날 보창ㆍ普昌으로 개명)를 세워 강화 사람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군복에 칼을 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강화읍 거리를 달릴 때마다 사람들이 절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산의 회고에는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뒷날 같은 공산주의 기치 아래 독립운동을 했으나 이동휘는 상해파의 거두가 되고, 죽산은 이르쿠츠크파여서 서로 등을 돌렸던 때문인 듯하다.

1907년 강화에서는 군대 해산에 불복하는 진위대원들의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진압하러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는 갑곶진에서 매복에 걸려 6명이 전사했고 그 보복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죽산은 이때 아홉 살이었으므로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죽산은 강화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의 후신인 강화초등학교에는 보통학교 시기 학적부가 화재로 소실되어 없고 일부가 불탄 졸업대장을 재작성해 보존하고 있다. 죽산은 '4회, 증서번호 41, 15세, 명치 45년(1912) 3월 25일 졸업'으로 기록돼 있다. 4회 졸업생 19명 중 순위는 열 번째, 그러나 주산 실력은 뛰어났다.

성적이 중간인 이유가 있었다. 을 보면 소년시절 공부는 안 하고 어지간히 말썽을 피운 듯하다. 걸핏하면 아이들 머리를 터지게 하거나 남의 집 장독을 깼다. 모친은 사과하고 물어내느라 바빴다. 그때마다 회초리를 들었고 죽산은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무간섭 평화주의자처럼 살았고 무골호인이었다. 집이 가난했으나 분위기는 평화롭고 자유로웠다.

어린시절 친구 유찬식 조광원 정경창

유년시절에 사귄 친구 유찬식(劉燦植) 조광원 정경창(鄭慶昌)은 세상에 웬만큼 알려진 인물들이다. 유찬식은 경성고보를 나와 일본에 유학 가서 도쿄물리학교를 다녔는데 뒷날 죽산을 도쿄로 불러 대학에 다니게 했고 함께 자취하며 엿장수 고학을 했다. 조광원은 인천상업중학을 나와 은행원이 됐다가 하와이에 유학, 최초의 한국인 성공회 사제가 되고, 8ㆍ15 광복 후 진주하는 미군을 따라 군종신부 신분으로 귀국했다. 정경창은 강화와 인천에서 청년운동, 노동운동을 했다. 죽산이 주도했던 신흥청년동맹 맹원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다. 그리고 죽산의 영향력에 힘입어 그의 모교인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다녔다. 어릴 적 친구인 죽산의 추종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죽산은 2년제 농업보습학교도 다녔다. 정규 실업학교에 가지 못하는 소년들에게 실습 위주 교육을 하는 2년제 과정이었다. 대도시는 실업학교에 부설되었지만 강화에는 실업학교가 없어서 그가 졸업한 공립보통학교에 부설한 것이었다. 수신(修身), 국어, 한문, 일어, 산술(算術), 주산, 농업기술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죽산은 주산을 열심히 했는데 졸업할 때는 6단위 숫자의 가감승제산을 빠르게 할 정도였다.

연희전문 교수와 이승만 정부의 공보처장을 지낸 갈홍기(葛弘基)가 죽산이 자신과 동문수학했다고 회고한 기록이 있다. 갈홍기는 1906년 강화에서 출생해 부친 갈형대(葛亨大)가 교장으로 있던 보창학교를 나왔다. 그러나 죽산과 7년의 나이 차가 나므로 동문수학했다고 보기 어렵고 죽산의 회고에 그 학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

죽산은 보창학교를 나온 후 일급 10전을 받고 강화군청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추운 겨울에 자전거를 타고 예하 면사무소를 왕래하느라 손가락에 동상이 걸렸다. 그러다가 월급 10원을 받는 군청 임시 고원(雇員)이 되었다. 총독부가 대대적인 토지조사를 하면서 일손이 모자라 뽑은 것이었다.

토지조사 사업이 끝나 군청을 그만둔 뒤에는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했다. 어렸을 때 잠시 다닌 적이 있는 신문리 잠두교회에 열심히 나가 청년회 활동을 했고 권사라는 칭호도 얻었다. 첫사랑인 김이옥(金以玉) 양을 만난 곳도 이 교회였다.

동상에 걸린 손가락 여러 개의 끝이 괴사한 것 외에 이때까지의 삶은 평온했다. 그러나 스물한 살 봄 강화읍의 3·1 만세 시위에 참가하면서 죽산은 격랑 속에 휘말려버렸다. 그때부터 죽산의 생애는 마치 영웅서사시의 주인공처럼 시련과 영광, 그리고 극적인 반전으로 펼쳐졌다.

이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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