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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한병철 교수 '피로사회' 한국어판 발간/ "능력·성과 강조하는 현대는 자기착취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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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한병철 교수 '피로사회' 한국어판 발간/ "능력·성과 강조하는 현대는 자기착취 사회"

입력
2012.03.0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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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철학자 한병철(53) 카를스루에조형예술대 교수가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의 한국어판 발간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공대 출신 철학자'란 독특한 이력을 가진 그는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후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8일 광화문에서 기자들과 만난 한 교수는 "독일에서는 일하다 지쳐 죽는 '번아웃 신드롬'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됐다"며 "독일 대학들도 미국식 체제로 개편되면서 교수들이 연구성과에 매달려 자기 언어로 철학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서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2010년 독일서 발간된 <피로사회> 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 유력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지난해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철학서로 꼽혔다.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덴마크어, 중국어로 번역 출간될 정도로 반향을 얻고 있다.

책의 핵심은 포스트모던 이후 현대사회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한 교수는 "근대, 탈근대에는 주인과 노예가 명확히 구분됐고 타자의 착취가 문제로 지적됐지만, 현대에는 이 관계가 모호해지면서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착취'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근대와 탈근대 서구사회를 지배한 패러다임이 금지, 강제, 규율, 결핍 등 '부정성'이라면, 20세기 말부터는 능력, 성과, 자기주도 등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됐다고 말한다.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얼핏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유를 극대화하며 더 큰 착취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과거의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대체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강제를 통한 생산성 증대는 한계가 있어요. 현대사회는 더 많은 자유를 주고 자아 긍정성, 능력의 신장을 강조하며 인간이 스스로 착취하도록 만듭니다. 내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 때문에 착취당하는 줄 모르는 거죠."

요컨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마모시킨다는 것. '피로사회'는 그런 사람들의 피로가 누적된 사회를 일컫는다. 한 교수는 나아가 금지, 억압, 규율, 감시, 주권자 대 희생자의 이분법과 같은 부정성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프로이트, 푸코, 아감벤의 이론을 긍정성의 패러다임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 자기착취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는 무엇일까. 한 교수는 그 역시 '피로'라고 답한다. 책의 말미에 독일작가 피터 한트케의 에세이 '피로에 대한 시론'을 인용한 그는 자기착취에 지친 부정적 의미의 피로를 '자아 피로', 자아가 세계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상태를 '근본적인 피로'라고 구분하며 "자기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인식하고, 넓은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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