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53 성균관'. 6일 밤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고 이정우(80)씨의 본적이다.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이씨는 태어나고 자랐다. 장성한 뒤 눈을 감기까지 50년 동안은 '공자님'을 모시며 성균관의 수복(守僕)으로 일했다. 성균관 내의 여러 건물을 관리하며 제사를 돕고 성균관을 드나드는 학생들의 수발을 드는 일이었다. 그에게 성균관은 평생 '일터'이자 '고향'이었던 셈이다.
고인의 집안은 260여 년간 대를 이어 '성균관의 일꾼'으로 살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가 대대로 그랬다. 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에서 자리를 지키던 큰 아들 태형(55)씨는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성균관 수복증명서를 가지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며 "정확하지는 않아도 아마 영·정조 시대 때부터 성균관 울타리 안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성균관 수복은 보통 부지런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3만3,000㎡가 넘는 성균관 내 모든 건축물과 뜰을 관리해야 하는데다가 1년에 2번씩은 성균관의 가장 큰 행사인 '석존대제' 때 쓰일 음식과 술, 제기, 식기를 준비해야 한다. 매달 2차례 열리는 정기분향 준비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 200여개가 넘는 향교에서 수시로 올라오는 유림들의 안내도 온전히 수복의 몫이다. 성균관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받는 월급은 110만원 가량. 부인 김인겸(76)씨는 "영감은 항상 그 돈도 많다고 했었다"고 했다.
"영감은 공자님 모시고 유림들을 보며 자라서인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세속 일은 맞지 않는다'고 했어요. 시아버지가 하셨던 대로 혹여 성균관 뜰의 은행나무 한 그루 누가 해칠까 늘 조바심 내며 살폈던 사람이었어요."
국가유공자였던 이씨는 한국전쟁 당시 입은 총상으로 다리를 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새벽 5시만 되면 일어나 성균관 뜰을 쓸었다.
이토록 성균관을 아꼈던 이씨 내외한테 위기가 닥쳤다. 4년 전 갑자기 성균관을 떠나야 했다. 숭례문 방화로 인해 문화재청의 문화재 관리가 엄격해지면서 성균관 거주 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부인 김씨는 "태어나서 그 때만큼 펑펑 울었던 적이 없었다"며 "내색 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도 평생 산 터전을 하루아침에 떠나야 했으니 많이 서운했을 것"이라고 했다. 성균관을 등질 수 없었던 이씨 내외가 그래서 둥지를 튼 곳은 유림회관 상가 건물의 40㎡ 남짓한 조그마한 방. 성균관 대성전 건물과 1분 거리다.
이제 '성균관 수복'이란 가업은 셋째 아들 욱(46)씨가 잇게됐다. 그는 "'출세해라', '성공해라'는 그 흔한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공자님 뜻대로 착하게 어른 공경 하면서 살아라'고 하셨던 아버지 유언을 따를 것"이라고 했다. 고인의 발인은 9일 오전 6시 30분. 장지는 대전현충원이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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