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천명한 '강한 러시아'의 부활은 대외정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키워드다. 푸틴은 지난 10년 간 이룩한 고도경제성장을 발판으로, 미국과 세계패권을 겨뤘던 냉전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출발점은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 재조정이다. 러시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시절 미국과 '리셋(재설정) 외교'로 명명된 화해ㆍ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부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신 전략무기감축조약(START) 체결, 북한 핵문제 협력 등이 그 소산인데 이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러시아의 전략적 이익을 꾀하기 위한 반대급부의 성격이 컸다.
그러나 푸틴은 더 이상 미국의 '예스맨'이 되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공언했다. 그는 지난달 한 기고문에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행동은 냉전식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대선 투표일 직전엔 "미국이 반정부 세력에 자금을 지원하며 러시아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암울한 미-러 관계를 예고하는 암초는 곳곳에 상존한다. 특히 미국과 NATO가 유럽에 추진 중인 미사일방어(MD)체제가 걸림돌이다. 푸틴은 MD를 "독점적 방어력을 구축하려는 의도"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을 선언했다. 향후 10년 동안 지난해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3%에 해당하는 867조원의 국방비를 쏟아 부어 안방을 호락호락 내주지 않겠다는 것이 푸틴의 구상이다. 푸틴이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러시아에 부여하려던 항구적정상무역관계(PNTR) 지위를 빌미로 대미 공세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PNTR은 미 공화당이 러시아의 인권탄압을 이유로 극렬 반대하는 사안이다. 미국의 네이션지는 "푸틴은, 11월 대선을 앞두고 운신의 폭이 좁아진 오바마 대통령의 처지를 십분 활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과 서방에 맞서는 토대는 지역협의체 및 다자 실리외교 강화로 요약된다. 푸틴은 뿔뿔이 흩어진 구 소련 소속 국가들과 경제ㆍ안보 동맹을 통해 느슨한 독립국가연합(CIS)의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NATO의 동진에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로, 유럽연합(EU)의 자본 공세에는 유라시아경제연합(EEU)으로 대응하는 두 개의 전선도 구축했다.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유치(9월), 2014년 핵안보정상회의 유치 제안 등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려는 다자 협력의 일환이다.
푸틴의 대 한반도 정책 역시 실리외교의 연장선상에 있다. 남북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등거리 외교가 골격을 이룬다. 러시아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 남ㆍ북ㆍ러 가스관 연결,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 사업 등 경제적 이득을 위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푸틴은 지난달 27일 한 언론 기고문에서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북한의 야망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국제사회가 북한의 새 지도자인 김정은 체제의 견고함을 시험하려 해서도 안된다"고 강조했다. 북한 핵보유의 위험성은 충분히 인식하되, 체제 유지가 러시아의 이익에 더 부합한다는 뜻이다. 국립외교원은 "올해 강성대국 진입을 선언한 북한도 대중 편중외교를 시정할 필요성이 생겼다"며 "지난해 북한과 러시아가 9년 만에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은 이런 전략적 이해의 합치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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