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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명성도 던져 버리고… 뇌성마비 딸을 교수로 키운 엄마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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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명성도 던져 버리고… 뇌성마비 딸을 교수로 키운 엄마의 힘

입력
2012.03.0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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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어린 딸에게 엄마가 줄 수 있는 것은 용기밖에 없었다. 평탄치 않을 딸의 미래를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다. '1960년대 최고의 여성 트리오' 멤버라는 명성도 던져버렸다. 그렇게 기른 딸이 지금 대학교수가 돼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71세의 '젊은 할머니' 김희선씨. 1964년 언니 천숙씨 등과 3인조 트리오 이시스터스를 결성,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시스터즈는 발랄한 트위스트로 60년대의 낡고 무딘 감성을 자극하고 관능의 코드로 전후의 칙칙함을 몰아냈던 최고의 인기가수였다. '울릉도 트위스트' '서울의 아가씨' '목석 같은 사내'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별들에게 물어봐' 등 수많은 히트곡과 군인가요 '여군 미스리',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과 함께 불렸던 '좋아졌네' 등이 그들의 노래다.

절정의 인기 가도를 달리던 1966년 결혼해 가정에서도 가요계에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김씨는 1973년 세 살이 된 딸 유선이가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날의 충격을 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김씨는 곧바로 가수 활동을 접고 아이 치료에 전념했다. 아이가 학교 갈 나이가 됐을 때 엄마는 비장애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유선이는 고등학교까지 그렇게 다녔다. "장애를 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딸이 말이 어눌하고 잘 걷지 못해 자주 넘어져도 비장애 아이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딸은 사회의 편견에 속으로 울고 있었다. 딸이 중학교 다닐 때 우연히 본 일기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부모님은 왜 나를 태어나게 했을까.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게 너무 싫다.' 김씨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딸에게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북받치는 슬픔에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딸이 좌절하지 않게 용기를 주었다. 둘이서 외출도 자주 했다.

"장애 자녀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부족한 게 있어도 잘한다, 잘한다 이야기하며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게 중요하지요. 딸에게 '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항상 말했습니다."

딸은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학교에서나 동네에서 또래 아이들이 놀려도 집에서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운동회 때 선생님이 "너는 안 뛰어도 된다"고 해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비틀거리면서 끝까지 달렸다. "딸에게 말했어요. 공부 잘하면 다른 사람이 무시하지 못할 거라고. 다행히 유선이가 성격이 밝고 도전정신이 강해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딸은 열심히 공부했고 월등한 성적을 냈다. 하지만 대학입시에서 실패한 건 감당하기 힘든 또 한번의 충격이었다. 상심한 딸에게 엄마는 유학을 권했다. 미국 버지니아로 이민 가 있던 언니 천숙씨에게 유선이를 부탁했다. 1989년이었다.

낯선 땅에서 하는 공부는 더 힘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만큼 영어가 되지 않자 유선이는 입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유선이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노력은 2004년 조지메이슨대학에서 의사소통 보조기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결실을 맺었다. 언어장애가 있는 한국인이 미국에서 최초로 받은 재활공학 분야 박사학위였다. 딸이 공부하는 동안 김씨는 한국의 남편과 미국의 딸 사이를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 딸은 이제 당당하게 대학교수가 됐다. 모교 조지메이슨대학에서 보조공학을 가르치는 42세 정유선 교수다. 그는 1995년 유학 중 만난 장석화씨와 결혼도 했다.

"결혼 못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잘 키워요. 너무 대견해요." 딸을 뒷바라지하며 김씨는 동화 구연가로 변신했다. "밖에 나가 놀지 못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지요. 의성어를 섞어가며 자연스럽게 읽어주다 보니 어느새 제가 동화구연가가 된 거 있죠?"

1976년 색동회 주최 전국어머니동화구연대회에서 입상한 그는 이듬해 동화구연회 창립을 이끌었다. 현재 색동회 이사로 활동 중인 김씨는 장애기관과 소아병동, 고아원 등을 찾아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가족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용기를 주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아쉽게 무대는 떠났지만 저는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지금 행복합니다."

워싱턴= 글ㆍ사진 이종국 미주한국일보기자 edit@koreatimesd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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