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하산 사장에 공영성 무너졌다"… 김비서·MB씨 조롱당해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 5일 저녁 서울 보신각 앞에서 MBC KBS YTN 3사 노조의 공동파업 출정식이 열렸다. 기자, PD, 아나운서 등 노조원 300여명은 마이크와 카메라 대신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정권 눈치만 보는 사장은 나가라." 보직을 내놓고 파업에 동참했다가 정직당한 최일구 MBC 앵커는 "전두환 정권 때처럼 후배들이 취재 현장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는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강택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이용마 MBC 기자가 이 정권 들어 12번째 (언론인)해고 희생자가 됐다"며 투쟁을 독려했다.
방송가에 파업 한파가 몰아쳤다. 1월 30일부터 파업 중인 MBC 노조에 이어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가 6일 무기한 파업에 돌입했고, YTN도 8일 파업에 나선다. 국가기간통신사 연합뉴스도 7일부터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한다. 방송사 동시파업은 1997년 노동악법 반대와 2009년 미디어법 날치기처리 항의에 이어 세 번째. 그러나 정부ㆍ여당이 사장 선임과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언론사들이 '공정방송 복원, 낙하산 사장 퇴진, 해고자 복직'이란 공통 목표를 내걸고 한꺼번에 총파업에 나선 것은 전례가 없다.
사측은 한결같이 "임금ㆍ단체협약 등 노사협상 대상이 아닌 요구를 내세운 불법파업"이라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초유의 동시파업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해 준다. "MB씨 방송으로 살 수 없다"(MBC) "'김비서'로 불리며 부끄러웠다"(KBS)는 고백처럼, 노조원들은 임금이나 근로환경이 아니라 제작 자율성 침해와 내부 검열이 만연하고 그로 인해 공정성이 훼손되고 신뢰가 땅에 떨어진 현실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그동안 방송에서 4대강 사업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내곡동 대통령 사저 의혹, 10ㆍ26 재보선 등 주요 이슈와 관련해 정부ㆍ여당에 비판적인 뉴스나 심층 보도는 누락되거나 축소되기 일쑤였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날씨, 동물 등 연성 뉴스와 정부 홍보 캠페인성 기사였다. 최근 KBS 공정방송위원회는 "누락ㆍ축소 보도만이 아니라 여당은 중립적이거나 개혁적 이미지를 부각하고 야당에는 부정적인 앵커 멘트를 내보내는 등 교묘한 불공정 사례도 많았다"고 지적했다. MBC 노조가 1월 언론학자 1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학자들 대다수가 MBC 보도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급락했으며, 이대로는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 공정보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 같은 현실은 지난 4년간 방송 장악에 골몰한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언론정책에서 비롯됐다는 게 언론계와 학계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언론인들이 집권세력의 확성기가 되면서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며 '방송 민주화' 요구가 다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해외 언론감시단체도 이를 지적했다. 파리에 본부를 둔 '국경없는기자회'가 평가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참여정부 후반기 30위대에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2008년 47위, 2009년 69위로 급락했고 2011년에도 44위에 그쳤다. 미국의 프리덤하우스도 지난해 5월 한국을 노태우 정부 이후 유지돼온 '언론자유국(Free)'에서 '부분적 자유국(Partly Free)'으로 강등하면서, 그 사유로 친정부 인사의 주요 방송사 경영진 임명과 방송탄압 사례 등을 들었다.
현 정부의 집요한 방송 장악은 2008년 2월 출범 직후 대통령의 멘토인 최시중 한국갤럽회장을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억지 배임 혐의를 씌워 정연주 KBS 사장을 해임하고 엄기영 MBC 사장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물러났다. 낙하산 논란 속에 그 자리를 대신한 KBS 이병순ㆍ김인규, MBC 김재철 사장은 방송문화진흥회 전 이사장의 표현처럼 "좌파 청소"하듯 조직을 바꿨다. 시사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폐지됐고 아이템 검열 등에 저항하면 해고 등 징계와 보복인사가 뒤따랐다. YTN도 구본홍, 배석규 사장 하에서 풍자로 인기를 끌던 돌발영상 폐지와 보복 인사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동시파업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들 방송사 경영진이 버티기로 일관하는 데도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정권 차원의 비호가 작용한다는 것이 언론계의 시각이다. 사장 임명 및 해임권한을 가진 KBS이사회와 방문진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여당 추천 이사들의 모르쇠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통합당 등 야당이 사장 퇴진 촉구 성명을 냈지만, 눈앞에 닥친 총선과 공천 파장에 휩쓸려 무게가 전혀 실리지 않고 있다. 방송사 동시파업으로 사상 유례가 없는 파행 방송 사태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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