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가 아니었다면… 아휴,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부인의 혈액형이 RH-B형인 이강록(42)씨는 지난달 겪었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 백혈병 치료를 받던 부인이 급히 수혈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피를 구할 곳이 없었다. 병원을 통해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문의를 했지만 "주말이라 쉽지 않다"는 답만 돌아왔다.
이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RH-형 혈액 보유자들의 모임인 인터넷 카페 '1/1000 아주특별한사람들'(이하 아특사)에 수혈이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다. 놀랍게도 바로 이튿날, 두 사람에게서 "내일 당장 헌혈하러 가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씨는 "혈액관리본부를 통해도 희귀 혈액을 구할 수 있는 응급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사실상 인터넷 카페나 민간 동호회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고 토로했다.
RH-형 혈액 보유자는 전체 국민 중 0.2~0.3%, 10만~15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마저 추정치일 뿐 혈액관리본부는 희귀 혈액 보유자가 정확히 몇 명인지 기초통계조차 갖고 있지 않다. 지난해에야 뒤늦게 'RH- 혈액 보유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고 하지만, 이는 민간 자원봉사단체인 'RH- 봉사회' 회원 명단이다.
정부가 이처럼 사실상 희귀 혈액 공급 시스템 마련에 손을 놓고 있는 사이 희귀 혈액 보유자들은 스스로 모임을 꾸려 '혈액 품앗이'를 하고 있다. 아특사가 만들어진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특사는 2004년 RH-형 혈액 보유자들의 친목모임으로 시작했다가 회원들이 "응급 상황에서 우리끼리라도 서로 돕자"며 뜻을 모아 일종의 '비상 혈액 공급망'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회원 수는 9,000여명. 카페 회원 김종민(20)씨는 "다칠까봐 두려워 자전거조차 마음놓고 타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돌발적인 위급상황에서 헌혈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카페에 가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RH-B형 보유자인 이영아(31)씨도 "지난달 둘째 아이를 출산할 때 관할 혈액원에서 혈액이 없으니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 알아보라는 조언을 들었다"며 "정부를 통해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털어놨다.
희귀 혈액 보유자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달리 혈액관리본부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혈액관리본부 관계자는 "민간 봉사회의 협조를 얻어 RH-형 혈액 보유자 2,500명의 연락처를 확보해두고 있고 긴급한 상황에는 본부의 고객만족팀에 연락하면 혈액을 공급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도 희귀 혈액의 공급부족 문제는 없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따로 통합관리 시스템을 만들 필요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특사 운영자 김형찬(42)씨는 "지난해부터 적십자사가 희귀 혈액 관리를 하고 있다지만 인터넷 카페보다 못하니 여전히 민간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줄지 않고 있다"며 "정부가 이제라도 희귀 혈액 보유자의 정확한 통계 파악부터 시작해 통합적인 혈액 공급 시스템을 갖춰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현빈기자 hb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