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통 허름한 건물에 자리한, 퀴퀴한 냄새를 풍기던 옛날 극장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화면 때깔부터 첨단 냄새를 물씬 풍기는 복합상영관이 전국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화려한 인테리어로 무장하고 현대식 빌딩에 입주한 복합상영관은 하나 같이 CJ, 롯데 등 재벌 계열사가 운영한다. 골목 상권은 장사가 안돼 죽을 맛이지만, 재벌이 운영하는 극장과 음식점, 식음료 매장, 대형마트 등은 늘 손님들로 넘쳐난다.
영세 상인들이 막강한 자본력과 마케팅 파워를 앞세운 골리앗을 당해낼 재간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백화점이나 극장에 갈 때마다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여기에 빵집이나 팝콘매장 하나 내면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 없겠구나.' 매일 수천, 수만 여명의 고객들이 장사진을 치는 곳에서 장사를 하니, 망할 리가 있으랴 싶다.
서민들에겐 머리 속에서나 떠올려보는 '대박'의 꿈이 재벌 2ㆍ3세에겐 일상으로 벌어진다. 며칠 전 공정거래위원회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롯데그룹 총수의 딸은 극장에서 팝콘 장사를 한다. 전국의 롯데시네마 수도권과 지방 점에서 15개의 팝콘매장을 운영하며 연간 수백 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계열사 영업망에 무임승차해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다.
삼성, 현대차, 신세계, 현대백화점 등 다른 재벌 그룹의 2ㆍ3세도 마찬가지다. 삼성타운, 신라면세점, 해비치호텔, 신세계ㆍ현대백화점 등 계열사와 기존 유통망을 이용해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손쉽게 돈을 벌어왔다. 총수 자녀들이 계열사의 도움을 얻어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전형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실태를 분석해 자료를 낸 공정위 간부는 재벌 2ㆍ3세로 내려올수록 창업세대의 기업가정신이 희박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창업 1세대도 비자금 등으로 권력과 유착돼 지탄을 받긴 했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기업가정신으로 초일류 기업의 기틀을 다져온 것 또한 사실이다. 박정희식 성장 패러다임을 성공으로 이끈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그들은 1인 독재의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기업활동이 국익(國益)에 직결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 경제적 이익의 사회환원을 통한 공익(公益)정신에는 비교적 투철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에겐 큰 기업은 작은 기업과 달라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다. "기업에는 기업에 따르는 사회적 책무가 있다. 작은 기업은 자기 기업만을 살리는 데 힘을 쏟기만 해도 된다. 큰 기업주는 그래서는 안 된다. 요즘처럼 수많은 관련 기업들과의 밀접한 연관을 고려해야만 할 때에는 큰 기업주는 단순히 자기 기업만을 살리려 애써서는 안 된다. 목전의 이익을 초월한 기업 활동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재벌 2ㆍ3세의 요즘 행태에서 창업세대의 기업가정신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한 언론인은 창업세대와는 다른 재벌 2ㆍ3세의 조급한 돈벌이 행태를 이렇게 분석한다. "많은 재벌 2세들은 가업을 일으킨 아버지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대해 엄청난 콤플렉스를 느끼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늘 남을 의심하고, 귀가 얇고, 조바심을 낸다. 성공한 아버지를 극복해야 하니 항상 가슴 속에 부담감을 안고 살아간다." 2000년 이후 재벌들이 2, 3세대로 내려오면서 가족 수가 크게 늘어나다 보니, 계열사를 만들어 일감을 몰아주거나 빵집이나 순대, 떡볶이 등 중소 상인들 영역까지 진출하게 됐다는 평가도 있다.
기업은 소비자의 신뢰를 먹고 산다. 신뢰를 잃으면 영업 활동도 이윤 창출도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는 약 600만명. 가족을 포함하면 기업의 가장 주된 고객층이라고 봐야 한다. 목전의 작은 이익에 급급해 자영업자를 벼랑 끝 위기로 내모는 것은 기업의 생존에도 치명적이다. 고객과 함께 하는 기업이 되라는 게 지금 시대의 요구다. 창업세대 기업가정신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을 외면하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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