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십 년 동안 공연 예술 문화는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우리 삶에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와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축이 되었다. 민중의 소리를 대변해 주던 판과 마당에서의 대리 만족은 조금 더 세련된 무대로, 극장으로 서서히 자리를 옮겨갔다. 1950년 국립극장의 개관과 더불어 정부의 지원 하에 창설된 국립극단은 본격적으로 무대 예술이라는 문화를 꾸려 나가며 관객들을 만나게 된다.
2012년 지금의 공연 예술은 훨씬 다양하게 분화하고 전문적인 조직을 요구한다. 따라서 공연의 제작 및 기획과 작품의 연출이 분리되고 크게는 극장 경영과 공연 기획이 서로 다른 형태의 살림을 하게 되었다. 극장의 운영을 위해 흥행을 보장하는 상업적 작품을 올리거나 다른 단체에 대관을 하기도 하지만 극장의 성격과 가장 잘 맞는 예술단체에게 공간을 제공하여 극장 자체의 이미지를 높이기도 한다. 70, 80년 대 이후 공간의 질적 향상과 확장으로 더 많은 극장들이 생겨났으나 전체적으로 예산 부족과 미진한 경영으로 인해 예술성과 흥행이라는 괴리감 사이에서 극장과 작품은 갈등 구도에 놓이게 된다.
극장은 곧 시민들의 얼굴이다. 예술단체의 레퍼토리는 사회와 문화의 거울이다.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통해 사회 내면의 깊은 밑바닥을 들여다 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극장이다. 관객은 배우를 통해 또 다른 나와 내 부모가 살아온 여정과 갈등에 몰입하게 된다. 거기에는 인생과 존재에 대한 철학을 토해 내고 부조리를 파헤쳐 드러내는 무대만의 해학과 자유로움이 있다.
그러나 요즘 많은 극장들이 수익을 위해 흥행성 있는 대중 공연을 더 선호하는 추세이다.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수입작품들이 창작물보다 많이 올라간다. 어떤 대형 극장은 마치 백화점 문화센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면 예술성만을 강조하는 단체는 대중과 멀어져 또 다른 고립에 갇히게 된다.
작품과 극장 모두의 상부 상조를 위해 요즘 극장들은 상주단체를 선정하여 일정 기간 계약을 하는 형태를 많이 채택한다. 상주단체를 선정할 때에는 극장의 성격과 기능을 고려하여 궁합이 잘 맞는 단체를 찾는다.
각 문화재단에서는 이러한 상주 단체와 극장의 관계를 재정적으로 후원하여 창작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주 단체와 극장간의 관계와 거기서 파생되는 나비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수익성만을 따지는 극장인지, 아니면 정말 민중의 소리를 반영하는 투혼의 현장인지 구분해야 하고 정직한 문화예술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극장은 새 부대에 좋은 포도주를 담듯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한 작품을 더욱 신중하게 선정해야 한다. 예술가들이 걷는 숙명적 싸움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치는 작품이 탄생될 수 있도록 그들의 역량에 힘을 실어주고 창작을 장려해야 한다. 그것이 극장과 기업 마케팅의 차이점인 것이다.
요즘 극장의 마케팅 전략은 티켓 수익에 초점을 맞춰 관객층을 형성한다. 관객의 입맛만을 배려할 것이 아니라 작품에 담긴 메시지에 힘을 실어야 한다. 우리의 극장이 사회를 등지고 공익을 외면한 채 품 안의 자식들만을 위한 문화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창한 담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뒤집어 보고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극장은 교육의 장, 역사의 산실, 무엇보다도 창조자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대변하는 창작 예술이 몸부림 치는 그런 치열한 현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혼을 극장에 상주하는 예술단체들이 늘 일깨우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상주예술단체와 극장이 협업하여 문화예술계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이러한 화두를 넌지시 던져 본다. 소비의 공간으로 안락한 공간으로 정체된 극장에서 다시 밑바닥의 부르짖음이 끓어 오르기를 기대한다. 모호한 문화센터로 전락하기 보다는 예술혼이 소용돌이 치는 벼랑이 되어다오.
박근형 연극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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