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피터 노왁 지음ㆍ이은진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432쪽ㆍ1만7000원
태초의 인류는 불을 이용해서 전쟁을 하고, 섹스를 하고 음식을 만들었다. 적과 동물에게 겁을 주고 동굴을 밝혀서 그림을 그리고(그런 동굴벽화 중에는 섹스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불을 이용해 식량을 익혀 먹었다. 이때부터 인류 역사는 전쟁, 음식, 섹스를 중심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예컨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후 처음 인쇄한 책은 성경이지만, 곧이어 찍은 것은 돈벌이가 된 <데카메론> 과 <캔터베리 이야기> 같은 성애를 다룬 작품이었다. 나폴레옹은 통조림 제조법 덕분에 유럽을 행군할 수 있었다. 캔터베리> 데카메론>
과학 전문 기자인 피터 노왁은 2004년 패리스 힐튼의 섹스 비디오를 보며 문득 이 사실을 깨닫는다. 오늘날 우리의 삶 역시 이 '부끄러운 삼위일체'로 굴러간다는 사실 말이다. 독특한 취향의 저자는 힐튼의 현란한 섹스 기술보다 (야광 투시 기법으로 촬영된) 그녀의 '에메랄드 빛' 피부에 꽂혔고, 힐튼의 섹스 비디오와 닮은꼴들(인간 욕망이 만든 과학기술)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렇게 찾아낸 20세기 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만든 과학기술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군대는 거대한 기술 창조자이면서 장기적인 얼리어답터다. 전쟁은 막대한 비용 때문에 민간에서 하기 어려운 갖가지 연구를 하게 만든 촉매제였고, 인류는 군대의 연구들을 발판 삼아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스팸은 전장의 병사들에게 필요한 열량을 공급하는 전투식량이었다. 테팔 프라이팬은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부산물인 테프론을 프라이팬에 입힌 것이다. 전자레인지는 적 전투기의 움직임을 미리 잡아내는 레이더 기술을 가정용으로 확장한 경우다. 인스턴트커피는 전쟁 기간 중 군에 납품한 분유를 만든 분무 건조 기술로 태어났고, 맥도날드 매장 주방에는 잠수함 주방 설계 기술이 들어가 있다.
포르노 산업은 군대의 신기술이 일반에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포르노 업체들은 소형 필름 카메라, DVD 판독기의 레이저 등 군대에서 개발한 통신기술과 수단을 포르노 산업에 발빠르게 들여왔다. 1950년대 미군 통신기술 아르파넷에서 발전한 인터넷은 1990년대 급속도로 전세계에 퍼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포르노산업이 역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플레이보이> 지는 1994년 미국 대기업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웹사이트를 만들어 인터넷 이용자를 폭발적으로 늘린다. 2009년 미국 전체 검색어의 25%가 성인 콘텐츠였고, 전체 웹사이트의 3분의 1이 포르노 사이트였다. 플레이보이>
이 책에는 한국의 사례를 든 것도 있다. 예컨대 970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포르노 시장에서 중국, 한국, 일본은 매출이 가장 큰 3대 국가다.(19쪽) 130억 달러를 포르노 산업에 쓰는 미국이 4위라고 하니, 우리나라 포르노 산업은 그보다 더 활성화됐다는 뜻이겠다. 우리가 1년에 1인당 80킬로그램이나 먹는 김치는 유통 기한이 짧아 수출이 어려웠지만, 2008년 한국인 최초 우주비행사 사업이 시행되면서 "한 달간 김치 발효를 늦추는 방법을 찾았"(181쪽)고, 이는 수출로 이어졌다.
이 모든 것들을 요약해서 저자는 다시 말한다. 무릇 인류의 역사란 전쟁, 섹스, 음식이라는 세 가지 욕구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만든다는 사실 말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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