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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1> 비극적 서사시를 닮은 죽산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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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1> 비극적 서사시를 닮은 죽산의 생애

입력
2012.03.0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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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사가 펴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의 기술을 중심으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의 생애를 압축하면 이렇다.

1899년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 소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마치고 군청 급사로 일했으며 3·1운동에 참가해 1년 간 투옥됐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 다니며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했다. 많은 청년 인텔리겐치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산주의가 조국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922년 귀국해 공산주의 그룹에 가입하고, 고려공산당 연합대회 국내 대표로 뽑혀 베르후네우딘스크에 갔다가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다녔다.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공산당 창당에 기여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만주로 가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했다. 그것은 뒷날 항일 파르티잔 투쟁의 기초가 되었다. 상하이에서 조선유일독립당운동 등 항일연합전선을 만들려는 노력도 했다. 1932년 체포당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을 복역하고, 인천에서 미강(米糠)조합 일을 하다가 일제 말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었다.

해방 후에는 인천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 지부를 조직해 이끌었다. 1946년 전향 성명을 내며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이승만 정권의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79만 표를 얻고 차점자로 낙선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는 216만 표를 획득해 낙선하고 그해 진보당을 창당했다. 1958년 구속되어 국가보안법과 간첩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사형당했다.

위 인명사전은 1996년판이다. 증보판이 나온다면 이런 문장이 추가될 것이다.

'2011년 1월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비극적 서사시의 주인공

역사가들은 학설과 실증적 문헌자료를 분석하는 데 주력하지만 작가는 인물의 성장 환경이나 풍모에 관심이 더 많다. 작업의 성과도 그렇다. 자료와 소재들을 자기 감성과 세계관에 어떻게 여과해서 그 인물을 형상화시키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죽산 조봉암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한 필자의 탐구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정태영ㆍ 서중석ㆍ 박태균 ㆍ 박명림 선생을 비롯한 연구가들의 논문과 저술, 그분들이 발굴한 자료, 그리고 수많은 신문 잡지 기사들을 찾아 읽는 것에 시간을 보냈다. 강화 출생지의 산야를 밟아보고, 인천 도원동 집과 서울의 약수동 집 자리, 부산 임시수도 시절 숙소가 있던 영도의 언덕, 임시의사당 건물, 상하이와 도쿄의 골목을 답사하는 등 무수히 발품을 팔았다. 유족들을 비롯해 선생을 수행했던 분들, 선생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을 만났다. 심지어 치매병원에 누운 분들을 찾아 뵌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죽산의 모습이 필자 가슴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았다.

서사 만들기가 본업인 소설쟁이의 눈으로 본 때문인가. 그렇게 하여 파악한 죽산 조봉암의 생애는 비극적 영웅서사시 주인공과 비슷하다.(죽산이 영웅이라는 뜻이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민족이 수난을 당하는 시대에 한미한 집에서 비범한 자질을 안고 태어나 시련을 헤치고 자기 앞길을 열어 간 것이 그렇고, 조국을 구하려고 한 몸을 던져 분투한 면이 그렇다. 여러 번 감옥에 갇혀 고초를 겪는 과정, 일본 유학과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와 청년운동 그룹의 최고 논객이 되어 강연회에 청중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영광을 얻은 것도 그렇다. 광복 후 전향을 선택하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제헌의원,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이 된 것, 두 차례 대통령선거에서 민초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는 것이 그렇다. 평화통일론을 주창해 이승만 정권의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론에 맞서다 꺾여버린 과정, 폭압에 의해 희생되는 비극적 결말이 또한 서사시의 결말 같다. 그가 죽은 뒤에 아, 그게 큰 손실이었구나 민중이 탄식하는 면도 그렇다.

또 있다. 죽산을 사랑했던 여성들의 운명도 아름답고 슬프다. 첫사랑이었던 김이옥(金以玉) 여사는 '사랑하기 때문에 붙잡지 못한' 여성이었으나 폐결핵에 걸린 절망의 상황에서 상하이로 찾아와 숙명처럼 결합했고, 그가 긴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고독하게 죽었다. 여성 투사였던 김조이(金祚伊) 여사는 6·25 한국전쟁 중 국회부의장인 죽산이 한강 인도교 폭파 직전까지 나라 일을 챙기느라 가족을 잊은 때문에 납북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다른 분의 사랑도 있었다. 그분의 사랑 역시 아름답고 슬프다.

민중의 가슴에 되살아오다

죽산이 역사에 남긴 자취는 선명하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은 제외하더라도 그를 벼랑으로 몰고 가는 빌미가 되었던 평화통일론, 피해대중에 대한 관심과 애정, 평등지권의 신념으로 토지개혁의 기초를 놓은 일 등이 그렇다. 일제강점기에 연합전선을 위해 분투하고, 광복 후에도 좌익과 우익의 중간을 걷는 제3의 길을 선택한 것도 그랬다.

그가 실현하지 못하고 남겨둔 평화통일론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 쪽 군함이 다른 쪽 잠수정의 어뢰를 맞아 생떼 같은 젊은 군인들이 수십 명 죽는 가슴 막히는 분단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입안한 토지개혁의 성공은 이 나라 농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줌으로써 혁명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1950년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됐으며, 대부분 토지 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건강한 힘이 뒷날 경제성장의 동력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사시의 주인공들은 죽고 긴 세월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남는다. 오늘 죽산의 존재가 그렇다.

이원규 소설가

● 작가 이원규

1947년 인천 출생. 84년 단편소설 <겨울무지개> 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86년 현대문학 장편 공모에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쓴 <훈장과 굴레> 로 당선됐다. 창작집 <침묵의 섬> <천사의 날개> 와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 없다 하랴> , 해외 독립전쟁 현장 르포 <독립전쟁이 사라진다> <저기 용감한 조선군인들이 있었소>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박영준문학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 "100년 뒤 나라 걱정했던 혜안 이 시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소설가 이원규(64)씨는 역사가 빚어낸 잔혹한 현실을 작고 소외된 이들의 눈을 통해 직시해온 작가다. 베트남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 '훈장과 굴레'에서도, 항일 투쟁의 역사를 담은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에서도 작가의 이런 따뜻한 시선이 오롯이 담겨있다.

작가는 40대 초반에 중국과 러시아 땅을 밟고 자료를 찾아가며 독립투쟁사에 눈떠갔다. "애국 투사들이 쓰러져간 땅에 혹은 무덤에 소주 한 잔을 부어드렸어요. 그러면서 '당신들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순의 나이를 전후로 하나씩 실현되고 있다. 2005년 그는 산처럼 우뚝했던 조선의 남아, 의열단 단장 김원봉 대장의 삶을 그린 평전 '약산 김원봉'을 펴냈다. 또 2006년에는 미국의 언론인인 님 웨일스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독립운동가 장지락의 삶을 우리의 눈으로 다시 읽어낸 '김산 평전'을 썼다. "두 책을 쓰자 '이제, 죽산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이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을 집행 당하셨을 때 몹시 슬퍼하시던 아버님의 얼굴이 떠올랐거든요."

하지만 작가가 강화도 출신으로 인천에서 정치적 기반을 잡은 조봉암에 대한 인연만으로 3년의 시간을 자료조사에 쏟아 부은 것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동서 냉전 구도 속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 죽산 조봉암 선생을 법의 이름으로 살해했고, 국민은 그런 폭압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수준이었습니다."

작가는 '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하다' 시리즈를 통해 그런 시대의 어둠을 떠나 보내고 100년 뒤의 대한민국을 걱정했던 죽산 조봉암의 혜안을 이 시대의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철저한 독립운동가로서, 자본 독재는 물론 계급 독재 역시 지양했던 선생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등 진정한 민주주의자로서 일찌감치 복지국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셨어요. 그런 선생의 숨결을 지면에 조금이라도 옮겨 보고자 합니다."

노 작가가 3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팔았던 다리품과 글을 쓰고 고치며 보낸 불면의 밤, 그리고 이를 함께 해준 역사적 증인들의 숨결이 '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하다'라는 이름으로 1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대법원이 지난해 초 선생이 간첩이 아니었고 북한을 이롭게 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는데도 명예회복에 반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부디 너그러운 가슴으로 그를 받아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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