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ㆍ김태환 옮김/ 옥당 발행ㆍ412쪽ㆍ17900원
다양한 문화와 정치적 성향이 공존했던 20세기 전반의 빈은 매혹의 공간이다. 그 무렵 조그마한 강의실에서 벌어졌던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곧 세계를 들여다 보는 통로였을 만큼.
1946년 10월 25일 케임브리지대학 모럴 사이언스 클럽의 주간 정례 모임이 킹스 칼리지 클럽에서 벌어졌다. 당대 가장 명민한 철학자로 일컬어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런던정치경제대학의 논리학과 과학 방법론 강사로 갓 임용된 칼 포퍼가 함께한 자리였다.
'철학적 문제란 존재하는가'라는 화두가 잡혀 있었던 그 날 오후 8시 30분. 긍정의 입장을 펼치던 포퍼, 존재하는 것은 오직 수수께끼 뿐이라고 반박하던 비트겐슈타인 사이에 일은 터졌다. 철학적 격론 끝에 난데없이 부지깽이가 날아가고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희대의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포퍼가"도덕 원칙이란 초청된 연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않는 것"이라며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이 책은 실제로 누가 먼저 불을 질렀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들 철학의 거두가 한자리에 모이기로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상아탑의 전설'로 남은 이 사건은 두고두고 호사가의 화젯거리였다. 그러나 책은 그로부터 진실된 인식과 합의의 도출이란 문제를 규명하는 데 진정한 관심을 둔다.
세기말 빈의 유대인 가정 출신인 점에서는 동일하나 양가가 가진 재화와 사회적 영향력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에서 출발, 사유 행위의 본질로 나아가는 책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최고 철강 재벌의 아들이었던 반면, 포퍼는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사범학교에서 생계를 병행해야 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인간적ㆍ사회적 조건을 중시하며 써내려 간 독특한 사상서다. 대립을 전면에 내세우며 진실의 더께를 하나씩 벗겨 가는 전개 방식이 추리소설을 닮았다.
길고도 고통스런 침묵과 느닷없이 쏟아져 나오는 강론의 주재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을 학과 생들은 "원자탄이나 회오리바람 같은 인물"(30쪽)로 기억한다. 옥스포드대학에서 가장 험난한 코스로 꼽히는 '리타레 후마니오레스'(고대 철학과 역사)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이 비트겐슈타인과 만들어내던 풍경을 이 책은 영화 장면처럼 생생하게 전한다. 모럴 사이언스 클럽에 대한 생생한 묘사, 논쟁의 심판관으로서 철학자 러셀이 보여주는 인간적 면모, 당시 그 방에서 벌어진 희대의 사건을 목격한 교수들 사이에 흐르던 인력과 척력의 전개 양상을 빠트리지 않으면서 한 편의 지적 지형도를 그려낸다.
학문적 신념에 몰입하고 헌신했다는 점에서 둘은 하나였다. "하나의 주제가 주어지면 더 이상 건져낼 것이 없을 때까지 계속 그 주제에 매달렸"(244쪽)던 포퍼만큼이나 비트겐슈타인은 "집중력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256쪽)다.
이 책은 동시에 사회사다. 나치가 전면에 대두하자 두 거인도 그 압력에서 비껴날 수 없었다. 부유했던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일련의 흥정을 치러야 했고, 가난뱅이 포퍼조차 영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책은 이들의 인간적 면모를 집안의 어두운 사연까지 들춰내며 세밀하게 묘파한다. 포퍼 집안은 누이들 중 한 명이 자살했고 아버지와 숙부들은 말도 안 할 정도로 척이 졌다.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는 가족이 숨도 못 쉴 정도로 폭군이었고 세 형은 자살했다. 정확성에 집착했던 그는 영화와 탐정소설을 탐닉했다
철저하게,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이 그리는 풍경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기기에 족하다. 키가 아주 컸던 비트겐슈타인, 왜소한 체구에 숫기가 없었던 포퍼는 동전의 양면이었을까.
이 책은 단언한다. 칼 포퍼가 살아 생전에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손 꼽힌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마력 때문이라고. 두 공동 저자는 이 책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리를 굳혔다. 원제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 비트겐슈타인의>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