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떠나라" "푸틴 없는 러시아를"
지난달 초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크렘린 궁 인근. 수만 명의 모스크비치(모스크바 시민)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 영하 20도에 가까운 혹한의 날씨도 이들의 함성을 막지 못했다. 시위대 12만명(경찰 추산 2만3,000명)은 저마다 반(反) 푸틴 구호가 적힌 흰색 리본을 달고, 손에 든 흰색 풍선을 흔들었다. 흰색은 푸틴의 크렘린궁 귀환을 반대하는 야권의 상징 색으로 자리잡았다.
같은 시각 모스크바 서쪽에서도 9만여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혼란 없는 러시아를'이란 구호 아래 모인 이들은 "안정적이고 강한 러시아를 위해서는 푸틴이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동서로 갈라진 이 장면에는 4일 치러지는 러시아 대선에서 승리가 거의 확실한 푸틴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난해 12월 4일 두마(하원)선거 부정으로 반푸틴 시위가 불붙은 이후 야권 지지자들은 푸틴의 권위주의 통치를 비판하며 "할 만큼 했으니 물러나라"고 하지만, 한 켠에서는 여전히 푸틴을 향한 애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대통령 재임 기간(2000~2008년) 연 7%씩 성장하던 경제 부흥기를 이끌었고, 공개석상에서 부패 기업가를 호통치는 등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다운 강한 면모를 보인 푸틴이 '강한 러시아' 부활의 기대 심리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찬반 진영 모두 러시아의 경제 부흥이 '푸티노믹스'(Putinomicsㆍ푸틴과 경제학의 합성어)에 힘 입은 바 크다는 점에는 수긍하는 분위기다.
'차르' 푸틴에게 도전하는 반대 시위가 확산되고는 있지만 러시아에서 아직은 푸틴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한창 때만큼은 아니지만 부정선거 논란 이후 40% 대까지 곤두박질 쳤던 지지율도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기관 레바다 첸트로는 최근 조사에서 푸틴이 66%의 지지율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야권에 푸틴에 맞설 대항마가 없는 데다 "미국의 '예스 맨' 역할을 하지 않겠다"며 강한 러시아 재건을 기치로 내건 푸틴을 향해 '미워도 다시 한번'을 외치는 유권자가 많기 때문이다.
야권 후보 4명의 지지율이 10% 안팎에 머물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푸틴은 4일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의 득표율로 당선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대통령직에 복귀한 푸틴이 정치 개혁과 민생 개선 등 약속을 제대로 실천할지 여부다. 푸틴은 압제적인 공권력 시스템의 개선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사치세 도입, 공무원 부패 척결 등을 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또 인터넷에서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얻은 사회적 안건은 의회에서 반드시 검토하겠다는 제안도 했다. 하지만 야권 등 비판 세력은 "푸틴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실제로 언론의 쓴 소리를 듣겠다며 자리를 마련했던 푸틴은 돌아서자마자 자신에게 비판적인 라디오 방송 에호모스크비(모스크바의 메아리) 이사진을 쫓아내는 등 이중성을 드러냈다. 야권은 "푸틴이 당선되더라도 반대 시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두 개의 러시아에서 갈등과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외신들은 예상했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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