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산맥의 두꺼운 얼음 속에 5,300년간 묻혀 있다가 1991년 발굴된 냉동 미라 ‘아이스맨 외치’의 게놈(유전정보)이 해독됐다. 조난당한 등산객으로 오인될 정도로 뼈와 피부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던 유럽 최고(最古) 미라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면서, 선사시대 인류 연구뿐만 아니라 현대의 전염병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28일 BBC와 msnbc 방송 등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유럽 미라ㆍ냉동인간 연구소는 외치의 엉덩이뼈에서 추출한 표본으로 DNA를 분석한 결과 외치가 이탈리아 사르데냐와 프랑스령 코르시카에 거주하는 현대인과 매우 흡사한 유전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외치의 유전자가 그가 살던 알프스 쪽이 아니라 지중해 쪽 거주민과 가깝다는 것은 의외의 결과인데, 연구팀은 이를 통해 외치의 조상이 중동 지역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다음 유럽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팀은 외치의 혈액형이 O형이며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밝혀 냈다. 외치라는 이름은 미라가 발견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알프스 지역의 외치라는 지명에서 따왔다.
연구팀은 이와 함께 외치의 뼈 표본에서 인간 DNA뿐만 아니라 라임병(진드기로 전염되는 세균성 감염증)을 유발하는 박테리아인 보렐리아 부르그도페리를 함께 발견했다. 70년대에 와서야 존재가 규명된 라임병이 선사시대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외치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연구팀은 그가 심혈관계 질환과 관련된 유전적 소질을 갖고 있었다고 진단했다. 체중이 무겁지도 않고 운동량이 많았던 외치가 심혈관 질환을 앓았다는 것은 이 병이 꼭 생활습관과 관련돼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외치에게서는 또 우유를 흡수ㆍ소화하지 못하는 유당불내증도 발견됐다. 외치가 살았을 무렵은 수렵생활을 하던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며 한 곳에 막 정착하려던 시기다. 가축을 기르지 않았고 따라서 우유를 접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 인류에게는 유당불내증이 흔한 질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런 병을 앓던 외치가 45세 무렵 숨진 것은 정작 병이 아니라 외부 충격 때문이었던 것으로 연구팀은 보고 있다. 왼쪽 어깨 쪽에서 돌로 만든 화살촉에 맞은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미뤄 외치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뒤 발견 장소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치는 이집트 미라와는 달리 방부제 처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매장돼 수분을 함유한 가장 오래된 미라로 알려져 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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