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2009년 내사종결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을 다시 파헤치는 것일까.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37)씨의 미국 아파트 구입 자금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13억원(100만 달러) 밀반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지난달 26일 한 보수단체의 수사 의뢰로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지난 27일 밤 문제의 100만 달러를 송금받은 아파트 주인 경모(43ㆍ여)씨에게 소환을 통보했다. 경씨가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미 관련자들의 진술은 물론 구체적 물증도 어느 정도 확보했다는 얘기다. 100만 달러가 전달되는 중간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미국 카지노 매니저 이달호씨와 그의 동생, 경씨한테 돈을 전달한 당사자인 수입차 딜러 은모씨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마쳤다.
특히 검찰은 경씨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을 27일 입원 중인 병원을 찾아 조사했다. 검찰은 이와 관련, "이번에 제기된 13억원 의혹과 관련해 조사한 것으로, 박 전 회장이 2007년 6월 권양숙 여사한테 건넸다는 100만 달러 부분을 재조사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는 "현재 수사 초점은 13억원의 출처가 아니라, 이 돈이 경씨한테 전달되는 과정"이라는 검찰의 기존 설명과는 사실상 배치되는 것이다. 결국 이 돈도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높다고 검찰이 의심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얘기다.
이번에 제기된 의혹의 기본 얼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이씨는 보수언론 등과의 인터뷰에서 "2009년 1월 (아파트의 원래 주인인) 경모씨가 정연씨한테 '돈이 급하다. 100만 달러를 빨리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 돈은 아파트 매입대금의 잔금인 것으로 안다"며 "경씨가 돈을 받아달라고 부탁해 한국에 있는 동생을 시켰다"고 말했다.
이씨의 동생은 이후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과천역 부근 비닐하우스로 갔고, 그곳에서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착용한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성이 13억원이 든 현금 상자 7개를 건넸다는 것이다. 이씨 형제는 "이 돈을 6억5,000만원씩 두 차례로 나눠 은씨에게 전달했다. 은씨는 환치기를 통해 30만 달러를 경씨에게 송금했고, 나머지는 경씨가 직접 밀반출해 간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이씨의 동생은 문제의 현금이 담긴 박스 3개를 사진으로 찍어 공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사실 단순한 외화 밀반출 사건이다. 게다가 최근 자진귀국한 이씨와 그의 동생은 검찰이 연락하기도 전에 먼저 조사를 받겠다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그리 복잡한 사건이 아닌데다, 관련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있는 만큼 검찰의 수사 속도가 빠른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시작은 이제부터라는 점에서, 향후 수사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경씨가 검찰의 출석 요청에 순순히 응할지 미지수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를 강제로 귀국시킬 방안도 마땅치 않다. 또 돈의 출처 규명을 위해서는 '선글라스 마스크 중년남'이 과연 누구에게서 13억원을 받아갔는지 밝혀야 하는데 검찰은 아직 이 남성의 신원을 특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연씨를 곧바로 소환하기는 검찰로서도 부담스럽다는 점에서 '13억원 미스터리'가 낱낱이 드러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설사 이 돈이 노 전 대통령의 숨겨진 비자금이라 해도, 이미 고인이 된 상황에서 수사의 실익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이 돈과 관련된 사실관계가 밝혀질 경우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당분간 검찰 수사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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