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속 그녀는 평범했다. 어느 동네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그래서 눈길 한번 주고 금세 잊어버리는 그런 어정쩡한 미모. 외모든 능력이든 뭐든 내세울 게 없는 여자라면 무릇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그래야 아버지가 남긴 빚의 구렁텅이 때문에 지상 지옥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피칠갑을 한 채 몸부림칠 만하지 않을까. 영화 '화차'의 중심 인물 선영은 수수한 용모의 김민희이기에 영상으로 구체화 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배우는 배우. 28일 오전 서울 신문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민희(30)는 역시나 배우였다. 금세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커다란 눈망울도, 남자들의 순정에 치명상을 입힐 날카로운 콧날도 지니지 않았지만 주변의 조도를 1룩스 가량 높여주는 외모로 카메라 앞에 섰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은근한 매력을 뿜어내는 미모다.
영화 '화차'는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진 여자 선영과 그의 행방을 쫓는 약혼자 문호(이선균), 문호의 사촌 형인 전직 경찰 종근(조성하)을 기둥 삼아 물음표 가득한 집을 짓고 이를 다시 분해해 느낌표를 찾아가는 작품이다. 일본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추리소설을 한국적 현실로 풀어냈다. 사채에 짓눌리면서도 진정 새로운 삶을 살려고 했던 한 여인의 끔찍한 사연이 처절하고도 처연하다. 선영은 117분의 상영시간 동안 이야기의 주요 고비에만 얼굴을 내밀지만 영화는 많은 부분을 그에게 의지한다.
김민희는 '화차'를 시나리오로 처음 접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가로챈) 선영의 선택이 이해가 가면서도 연민이 느껴져 울었다"고 했다. 만남부터 감정이입이 되어서일까. 복잡한 심리를 단조롭고 간결하게 표현해야 하는 연기인데도 김민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범한 외모의 주인공과 잘 어울린다"고 말하자 환한 미소로 되물었다. "정말요? 정말 듣고 싶었던 칭찬인데요."
되짚어보면 영화 속 그의 역할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사무소 제빵강좌의 보조강사('순애보') 또는 제 멋에 사는 털털한 시나리오 작가('뜨거운 것이 좋아'). 전작 '모비딕'에선 담배 냄새 풀풀 풍기는 사회부 기자(그것도 공대 출신!)였다. 10대 후반 이미 CF 퀸에 등극했고, 패셔니스타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 것에 대한 반감이었을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 그런 모습에 전 만족해요. 저는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거든요. 꾸며서 예쁜 모습에 어울리는 분들은 따로 있어요. 그리고 영화 찍을 때 예뻐 보이려고 하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1999년 드라마 '학교2'로 데뷔해 대중과 만난 드라마와 영화는 각각 6편. 과작이다. 그는 "일이 욕심대로 되는 게 아니다"고 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원하는 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면 진짜 내 것이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덧붙였다. 예전엔 "기다림이 가장 힘들었는"데 이제는 "(과작이) 내 방식이 된 듯하다"고도 말했다. "부담스레 주목 받던 예전과 달리 스타가 아닌 배우로 조용히 죽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다 배우로 인정 받고 주목도 받고 싶어요."
그는 "마음을 비워놓는다"는 말을 자주했다. 10대 후반 태풍과도 같았던 인기의 홍역을 치러내면서 삶의 비의를 알아챈 걸까. "이번 영화에서 웃을 때 눈가에 접히는 주름이 전 좋더라고요. 나이든 배우들의 주름은 참 아름다워요. 일부러 가질 수 없는 매력이잖아요. 세월의 자연스런 흔적을 간직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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