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텝스·토클·경시… 자사고 늘며 중위권 중학생도 무한경쟁
올해 A특목고의 신입생이 되는 정모(16)군은 지난해 말 치른 입학시험에 대해 "별로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기소개서 잘 쓰고, 영어 내신 잘 받는 게 관건이어서 오히려 수월한 편이었다"고 말했다.
정군의 말처럼 특목고 입시의 부담이 줄어든 것은 2011학년도부터 도입된 자기주도학습 전형 때문이다. 그 전까지 외국어고 입시는 전 교과과목의 내신성적, 영어 듣기 및 구술 면접 등을 치러 이에 대비한 사교육 부담이 컸다. 그래서 교육과학기술부는 지필고사를 금지시키고, 특정 과목의 내신 성적(외국어고는 영어, 과학고는 수학과 과학)과 면접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교과부의 의도대로 고교 입시 경쟁이 완화되고, 사교육도 줄어들었을까. 현장의 대답은 "아니오"다.
입학이 끝? 따라가는 게 문제
특목고생이 된 정군은 입시 부담은 적었지만 중학교 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그는 하루 4~5시간 자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토플과 텝스 성적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한 자사고에 입학하면 필수적으로 해야한다고 해서 미리 토클(국어능력인증 시험)까지 치렀다. 국어, 영어, 수학 경시대회 모두 참가했고, 영어토론대회, 에세이대회까지 나갔다. '좋은 고등학교 못가면 대학도 끝'이라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입시에 직접 반영되지 않아도 특목고와 자사고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준비하기 위해서는 각종 '스펙쌓기'와 심화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입시업체 하늘교육의 임성호 대표는 "자사고와 특목고의 경우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 수준이 일반계고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외고의 경우 수학 수업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은데도 졸업생의 수능 수학 성적이 높은 것은 그만큼 높은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에선 밤 10시까지 보충수업을 하고 부족한 부분은 사교육을 통해 메워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개교한 수도권의 B자사고에선 학교 수업에 따라가지 못한 학생들이 대거 자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자기주도학습전형만 믿고 입학했다가 사전 준비 없이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낙오하는 학생이 많다"며 "자사고, 특목고들은 실력이 처지는 학생들에 신경을 쏟기보다는 수준에 맞지 않으면 차라리 나가라는 메시지를 준다. 그것이 대입 실적을 높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사고 늘면서 고입 경쟁도 심화
고입 경쟁이 치열해진 데는 정부의 고교다양화 정책 영향이 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명박 정부는 외국어고 입시가 과열되자 이에 버금가는 좋은 학교들을 많이 만들어 입시 경쟁을 완화시키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자사고의 공급 과잉은 오히려 중학생들의 경쟁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올해 대입을 치르는 특목고, 자사고 졸업생의 숫자는 1만9,876명. 이는 이른바 SKY대(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모집 정원인 1만1,216명을 크게 웃돈다. 중학교 졸업 당시 성적이 반드시 대입까지 이어지진 않지만 상위권 학생들이 특목고와 자사고로 진학하는 점을 고려할 때 출발선이 다른 일반계고 학생의 진입장벽은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내년 대입에선 새로 지정된 자사고 졸업생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 이른바 '톱10'으로 분류되는 주요 10개 대학의 입학 정원과 비슷한 규모가 된다. 단순히 계산하면 일반계고 졸업생들의 명문대 진학문은 더욱 좁아진다는 뜻이고, 그만큼 중학생들의 경쟁은 치열해진다는 의미다.
하늘교육 임성호 대표는 "이전까지 특목고 입시가 최상위권 학생들의 경쟁이었다면 자사고 등장으로 고교 입시는 중상위권 학생들로까지 경쟁이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입시를 완화시키겠다는 자사고 정책이 공급 확대로 인해 오히려 현장에서 왜곡됐다"고 말했다. 서울의 자사고 1학년 자녀를 둔 박모(45)씨는 "요즘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외고와 자사고 입시를 준비하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느끼는 체감도와 동떨어졌다는 비판을 받는 정부의 2011년 사교육비 통계에서조차도 중학생 사교육비는 월 평균 28만2,000원으로 초등학교(24만1,000원)와 고교(21만8,000원)에 비해 높은 수준이었고, 유일하게 전년 대비 증가세를 나타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김승현 정책실장은 "자기주도학습전형으로 고교 입시단계에서 시험 경쟁 자체는 줄었지만 외고나 자사고에 들어가서 경쟁하려면 영어나 수학은 기본 이상이 돼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는 사교육을 계속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자사고 등장으로 고교체계가 서열화되고, 서울의 경우 고교선택제까지 결합된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최근 중학생 사교육비가 가장 높다는 조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 자기주도학습전형
고교 입시에서 사교육 유발 효과를 차단하겠다는 목표로 2011학년도부터 외국어고, 과학고, 국제고, 자율형사립고(서울 등 일부지역 제외)에 도입됐으며 비평준화 지역 자율형공립고와 자율학교에서는 일부 학교에서 시범 운영 중이다. 1단계로 내신 성적과 출결 성적으로 정원의 일정 배수를 선발한 뒤 2단계로 입학전형위원회에서 학습계획서, 교사추천서, 학교생활기록부를 바탕으로 면접을 통해 최종 선발한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 전문가 고교정책 해법
고교다양화 정책을 바라보는 교육계의 공통된 시각은 "더 이상의 자율형사립고(자사고) 확대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상당수 자사고가 다양한 교육을 실현한다는 취지에 부합하지 못하고 국영수 중심의 입시학원으로 변질된데다, 평준화 틀 붕괴, 교육계층화 등 가져온 부작용이 크다는 판단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내놓은 처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우선 자사고 운영실태를 철저히 평가해봐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 자사고뿐 아니라 외고까지 진지하게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양승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은 "충분한 준비 없이 자사고로 전환을 한 학교 상당수가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들 학교의 존재가 일반계고에 준 폐해가 상당하다"며 "운영실태 평가 등을 통해 취지대로 건학 이념에 따른 다양한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지정 취소하는 등 전반적인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취지 자체는 좋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너무 많은 학교가 자사고로 지정돼 일반계고에 주는 부담이 커졌다는 점이 문제였다"며 "자사고 숫자는 줄이고 자율권은 충분히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교수는 "다만 사립고에 가는 정부 재정을 아낀 만큼 공립고의 교육 질 개선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학은 사학답게, 공학은 공학답게 나름의 교육을 해 나가며 경쟁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와 달리 아예 중장기적으로 자사고, 외고 등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초중고교 단계에서 학교가 선발권을 갖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성기선 가톨릭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등학교까지는 누구나 민주시민교육을 받을 수 있는 보편교육을 지향해야 하는데 현 고교 체제는 학교간 차별화 서열화만 부추기고 있다"며 "설립취지에 부합하는 교육을 하고 있는 일부 과학고 등을 제외하고, 자율고는 모두 일반계고로 전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부 과목에서 수준별 수업이 불가피하다면 이는 학교 내에서 분반을 통해 해결할 일이지 학교를 아예 분리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김용일 한국해양대 교직과(교육행정학) 교수 역시 "다양화라는 말로 포장만 됐을 뿐 특정 학교에 학생선발권을 주면 성적과 경제적 배경에 따른 학교서열화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라며 "영국 역시 1988년 다양성을 말하며 일부 학교에 학생선발권을 줬지만 학업성취도가 높고, 집안 배경이 좋은 학생만 뽑는 현상이 지속돼 98년 이 정책을 폐기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양한 교육 실현이라는 본래 취지를 찾아볼 수 없는 다수 외고, 자사고 등을 일반고로 전환시키기 위한 정교한 경과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외고는 과학영재와 달리 외국어영재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다 입시학원화한 학교가 많아 역시 검증을 통해 일반계고 전환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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