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그런 일이 잦다 보니까 이제 이만한 전문용어는 다 안다. '방관자효과', 또는 '책임분산효과'다. 미국 심리학자 라테인과 로빈이 1969년 실험으로 입증한 것이다. 도와줄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도리어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이가 적어진다는 이론이다. 다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라며 망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서 5년 전 뉴욕 퀸즈 뒷골목에서 주변 모두의 외면으로 젊은 여성이 무참히 살해된 '제노비스사건'이 연구 계기가 됐다.
■ 며칠 전 퇴근길 지하철 객차 안에서 어린 소녀를 치한이 대놓고 성추행했다. 애절한 구원의 몸짓에 주변의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눈이 마주치자 얼른 다른 칸으로 피한 승객도 있었다. 결국 화장실로 끌려가는 걸 본 다른 시민의 신고로 화를 면했다. 이 정도면 책임 분산보다는 차라리 비겁한 현실 외면으로 보는 게 맞다. 만약 어느 한 명이 용기 있게 나서 치한을 제압했다면 아마 뒤늦게 우르르 달려들어 '정의 구현'에 가담했을 것이다.
■ 서글픈 이 사건에 겹쳐 떠올려지는 현상이 있다. 역시 자주 화제가 되는 지하철 막말녀, 막말남들이다. 당사자 아니고선 현장에서 모두가 외면하긴 마찬가지거니와 희한한 건 그 다음이다. 누군가 소심하게 찍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오르는 즉시 어떤 쌍욕도 허용되는 분노의 댓글로 도배가 된다. 돌연 모두가 사회악을 참지 못하는 정의의 사자가 된다. 더 정의로운 이들은 장본인에 대한 무차별 신상털기에 나서 거의 사회적 매장 수준의 단죄도 불사한다.
■ 극단적 비겁함과 정의감이 똑같은 이들에게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나타나는 이유는 자명하다. 현실적 위험 여부다. 조금이라도 위험 가능성이 있는 노출상황과 익명으로 집단을 이루는 안전한 상황의 차이다. 진정한 용기도, 책임도 필요 없는 이런 정의감은 족히 비겁한 정의감, 혹은 사이비 정의감으로 부를 만하다. 주로 인터넷공간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이 취약한 정서가, 크게 보면 우리사회 현안들을 걸핏하면 극단의 적대논리로 몰아가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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