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실험실에 홀로 틀어박혀 자기 연구만 하던 시대는 지났다. 동료 과학자와 얼마나 머리를 맞대느냐, 또 선의의 경쟁을 하느냐가 연구의 성과를 적잖게 좌우하는 시대다. 한국일보는 서로 북돋우고 때로 자극해가며 혼신의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계의 인맥을 소개하는 새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한국 과학 최전선의 네트워크를 바로 과학자 그들의 눈으로 더듬어보려는 시도다. 첫 회에는 김창경 교육과학기술부 제2차관이 노도영 광주과학기술원(GIST) 신소재공학부 교수를 소개한다.
한때 나 잘난 맛에 살았다. 비슷한 연구를 하는 선후배들 사이에서 주목 꽤나 받았다. 노도영(49) 교수는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부럽다 여겼던 사람이다.
1980년대 후반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때였다. 박사자격시험 직후 내가 몸담고 있던 공과대보다 한인 유학생이 훨씬 드물던 이과대가 술렁거렸다. 물리학과장 로버트 버지노 교수가 한국인과 미국인 학생을 불러다 "너희 둘 등수를 합치면 3"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칭찬했다는 것이다. 수재들만 모인다던 물리학과에서 동양인이 수석 아니면 차석을 했다는 건 당시로선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들었다 놓은 한국인이 바로 노 교수다. MIT 한인 유학생 모임에서 만난 그의 첫인상은 솔직히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해 보였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그에게 숨겨진 영민함을 알아봤고, 처음으로 타인에게 질투도 느껴봤다.
실력을 인정받은 노 교수는 미국의 제3세대 방사광가속기(APS) 설계에도 참여했고, 지금은 GIST에서 고에너지 레이저로 양성자와 전자를 가속시켜 물질의 구조를 밝히거나 새로운 암 치료법을 개발한다. 이런 분야는 단순히 실험만 잘 한다고 다가 아니다. 물리학 화학 수학 등 기초과학 이론으로 완전무장 해야 실험 설계나 결과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차관이 되기 전 난 주로 나노기술로 차세대 메모리반도체를 만들었다. 대부분 실험 위주였다. 실험으로 얻은 결과가 모여 그대로 논문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내 눈에 노 교수는 이론과 실험 능력을 겸비한 국내에 몇 안 되는 과학자다. 사실 노벨과학상을 안겨준 논문은 잘 알려진 이른바 3대 과학학술지 '네이처' '셀' '사이언스'가 아닌 다른 학술지에서 더 많이 나왔다. 예를 들어 '피지컬 리뷰 레터스'는 노벨상을 많이 배출한 학술지로 꼽힌다. 또 이론과 실험이 어우러진 연구성과를 싣는 대표적인 학술지다. 노 교수도 여기에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노 교수는 나보다 어리지만 내게 과학기술 멘토 역할도 톡톡히 했다. 지난해 초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서 실제 연구를 담당할 과학자 그룹인 연구단을 어떤 형태로 만들지 명확한 방침을 정해야 했다. 과학벨트 운영실무위원을 맡은 노 교수는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를 벤치마킹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 연구소는 나라가 운영하고 대학이 인력과 실험장비를 지원한다. 이 형태는 현재 추진 중인 과학벨트 연구단의 중요한 한 모델이 됐다.
노 교수를 알고 지낸 지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연구현장에서 조금 벗어나 보니 그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생겼다. 혹시라도 '깊이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말이다. 나 역시 과학자라 잘 안다. 한 연구에 너무 몰두하면 자칫 중요한 걸 놓칠 수 있다.
정리=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