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미안, 자이, 힐스테이트, 푸르지오….'
내로라하는 대표 건설사들이 짓는 아파트의 브랜드 이름들입니다. 브랜드 도입 단계에서부터 매체 광고와 각종 행사 스폰서에 이르기까지 건설업체마다 소비자 인지도 제고를 위해 수백억원 이상을 들인 이 아파트 브랜드는 건설사의 자존심이자 소비자들에게는 프리미엄 단지라는 '보증수표' 또는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진 이들에겐 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아파트란 생각을 갖게 만드는 '로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GS건설이 '상위 1%를 위한 고품격 주거단지'를 표방하며 분양중인 강북의 한 주상복합은 최초 분양 당시 붙은 '자이' 브랜드가 빠져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분양 전까지 '합정 자이'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모델하우스가 세워지면서 '서교자이 웨스트밸리'로 변경됐고, 입주를 넉 달여 앞둔 최근 지역명이나 브랜드명이 모두 사라지고 '메세나폴리스'로 또 바뀌었습니다.
회사 측은 프랑스어로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한다는 의미의 '메세나'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뜻하는 '폴리스'를 합성했다는 설명을 내놓았지만, 이 단지가 문화예술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어리둥절합니다. 랜드마크라고 자랑하는 단지일수록 브랜드를 강조하던 관행이 왜 갑자기 바뀐 것일까요.
여기에는 건설사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장기 미분양을 감추기 위한 것이죠. 분양시장의 찬밥신세인 중대형 위주로 구성된데다, 분양가도 인근 지역 평균 시세보다 1.5배 이상 높은 3.3㎡ 당 2,300만~3,500만원에 공급돼 청약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아직까지도 미분양이 남은 단지입니다. 결국 회사의 자존심인 '자이' 브랜드에 흠이 생기는 것을 막고, 새로운 이름으로 분양하면서 장기 미분양이라는 시장의 시선도 피해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이 회사가 주거 브랜드 '자이'를 넣지 않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5년 서초동에서 3.3㎡ 당 2,700만~2,900만원에 분양했던 오피스텔 '부띠크모나코'가 있습니다. 두 단지는 모두 최고급 명품 주거단지, 소수 VIP를 위한 특별함 등을 내세웠지만 ▦고분양가 논란 ▦장기 미분양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분양 적체는 건설업계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요인으로 떠올랐습니다. 미분양은 회사 이미지와 재무건전성, 기업 신인도와 직결돼 금융기관 등 외부에서 그 회사를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습니다.
'상위 1%'의 선택을 기대했던 주상복합. 하지만 이젠 99%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브랜드까지 내려야 하는 현실. 미분양 이미지와 선을 그으려는 업체의 속사정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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