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닮은 어떤 나라/데일 마하리지 등 지음·김훈 옮김
/여름언덕 발행·536쪽·2만5,000원
레이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빈곤한 노동계급 사람들과 새로 노숙자가 된 이들이 처한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수많은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다.' <미국을 닮은 어떤 나라> 의 저자들이 일종의 르포라고 해야 할 이 책을 준비하며 털어놓은 말에서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껴진다. 미국을>
하지만 글을 쓴 미국 컬럼비아대 언론학 교수와 사진을 맡은 워싱턴 포스트 사진기자가 어떤 주의ㆍ주장을 강력하게 펼쳐 놓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30년간 총 80만㎞를 여행하며 미국 각 지역의 하층민, 노숙자들의 다양한 인터뷰를 담기까지, 미국의 지방신문 기자로 처음 만난 저자 두 사람을 이끈 것은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게 적당하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서문에서 '나라나 국민을 그들의 성취로서만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연민, 정의감으로도 평가해야 한다'고 말할 때의 인간애 같은 것 말이다.
비슷한 작업으로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내 퓰리처상까지 받은 저자들의 작업은 그래서 누구를 고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월가의 탐욕을 꼬집지만 어떤 정책이 틀렸다고 논리적으로 따져드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 '경제 공황'이라는 선언과 전혀 무관하게 30년 동안 계속 공황 상태에 허덕이는 존재가 세계 최대의 부국 미국에 숱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뿐이다.
책은 1980년대 철강 공장들이 폐쇄되는 바람에 보수가 좋은 일자리 5만개가 사라지면서 황폐해진 오하이오주 도시 영스타운의 조 마셜 1세와 그의 아들, 또 켄 플랫 같은 전직 철강노동자 이야기로 시작한다. 조는 1930년대 후반 13세에 체코에서 미국으로 왔고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15세에 철강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1942년 제2차 대전에 참전해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싸워 가까스로 살아 남은 인물이기도 하다. 값싼 철강을 수입할 수 있게 되면서 이 구식 제조업은 퇴물 신세가 됐고 영스타운 같은 도시나 거기서 철강업에 종사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마치 버려진 셈이 되고 말았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의 일부는 노숙자가 되었다. 세인트루이스의 구세군 선교회에서 만난 샘 같은 신참 노숙자가 그런 사람이다. 청소대행업체를 차리고 한 대형식품체인과 계약했지만 경기가 나빠지자 계약이 취소돼 샘은 개인파산신청을 해야 했다. 가족은 집을 잃었다. 샘은 복지 원조를 받으라는 아내의 말을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가서 일자리를 찾아볼게"라는 말만 되풀이 했으나 정작 일거리는 없었다. 부부 관계는 파탄이 났고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일자리를 알아 보러 세인트루이스로 왔다가 돈이 바닥이 난 것이다. "꼭 내가 방글라데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저는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성장했어요. …저는 사람이 가난한 건 일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알렉산더 가족은 가장이 암염광산에서 실직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집이 경매에 넘어간 뒤 휴스턴에서 텐트 노숙하는 신세가 됐다. 제이는 경기의 변덕과 인생에 의해 흠씬 두들겨 맞고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 휴스턴에 와서 사이비 종교단체 같은 재단에서 노동을 착취 당하면서도 세뇌된 사람처럼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의료보험이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는 선천성 질환을 가진 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텍사스의 싱글맘 매기처럼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절망적인 궁핍 상태에서 살아가는 미국인은 도처에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네한테 등을 돌릴 것이라는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당혹감과 낭패, 혼란을 겪고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 이야기다.
책 후반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확대 이후 미국에서 중간계급은 상처를 입었고 지금 '엄청나게 많은 분노의 소리가 들끓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언론과 웹사이트 등에서 주목 받는 것은 보수가 벌이는 티 파티와 일부 극우 편향의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리처드 닉슨조차도 강력하게 지지했던 온건한 정책들, 곧 전 국민 대상 의료보험제도, 노동자들과 시민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산업규제안 등을 비방하고 헐뜯'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뭘 해야 한다는 것일까. 자신들이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들은 우선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나를 구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책 마지막에 캔자스시티에서 도시 농부가 된 싱글맘 셰리 하벨처럼 공동체를 일구어 제 힘으로 변화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 이야기를 실은 것도 그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민 참여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바꿔야 하고 그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가'라는 저자들의 질문은 한국에 던져도 물론 무방하다. 미국을 닮은 어떤 나라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미국으로 거듭 나야 한다는 그들의 메시지가 갖는 울림도 마찬가지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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