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운반 아르바이트로 고학을 하는 대학생이 있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던 그 시절, 정전이 돼서 병원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시체와 함께 꼼짝없이 갇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세 시간씩 기다리면서 그는 침대에 걸쳐 앉아 시체와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깨달았다. 죽음은 참 별 게 아니구나, 그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건너가는) '다리' 같은 것이구나.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그는 방송국 PD가 됐고, 진도 지방의 전통 장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초분'(草墳)을 만든다. 초분은 사람이 죽으면 짚으로 덮어 두었다가 3년 뒤 살이 썩고 뼈만 남은 시신을 씻김굿을 해서 정식 매장하는 풍속이다. 이 작품은 1977년 '다큐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유럽방송연맹 골든하프상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방송이 안됐다.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집을 싹 없애던 때라, 전통 같은 건 버려야 할 낡은 유산쯤으로 여겨진 탓이었다. 이 작품은 수상 소식이 들려오고 나서야 부랴부랴 그것도 잠시 전파를 탔다.
'초분'의 정수웅(69) 감독이 들려주는 이 사연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운영하는 서울 대치동의 공연장 한국문화의집(KOUS)이 마련한 '영락(映樂) 삼인삼색_그 남자의 영상 이야기'의 일부다. '영화'의 비칠 영에 기쁠 락. 한국 전통예술과 문화에 마음을 뺏긴 영화감독 3인의 이야기 콘서트다.
영상과 함께 간단히 춤과 음악도 곁들여 세 차례 진행될 무대의 주인공은 정 감독과 '서편제'의 임권택(76) 감독, '왕의 남자'의 이준익(52) 감독이다. 임 감독의 '서편제'와 '춘향뎐'은 눈으로 듣는 판소리이고, 이 감독의 '왕의 남자'는 조선의 줄타기 광대 이야기다. 전통은 어떻게 이들을 사로잡았을까. 이들이 영상에 담고자 한 정수는 무엇일까. 이번 무대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
임 감독은 젊은 시절 친척을 따라 들어간 광주의 한 기방에서 판소리를 듣고 얼이 빠져 버렸다고 한다. 판소리 등 한국 전통을 담은 그의 영화는 벼락치듯 다가왔던 그때의 경험이 남긴 화인이다.
"1961년 감독 데뷔 이후 10년간 50여편을 찍었는데, 전부 할리우드 영화의 아류였어요. 내 영화의 질을 높이려면 미국 영화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인력과 장비 등 여러 면에서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고민을 하게 됐죠. 한국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자, 그게 결론이었어요. 지금도 이게 제 연출의 핵심입니다."
그는 "전통은 화석처럼 굳었거나 오래 잊었다 해도 이미 우리의 유전자 안에 각인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서편제'를 찍으면서 실감했다고 한다. "촬영장에 판소리를 틀어놨는데, 처음엔 낯설어 하던 젊은 스태프들이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간단한 소리 정도는 부를 줄 알게 되고 판소리의 흥에 빠지더군요. 전통은 떨쳐버릴 수 없는 우리의 것이에요."
이준익 감독은 '전통은 구태의연하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전통은 낯선 것이어서 오히려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전통예인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젊은 세대를 만날 통로를 마련해야 해요. '왕의 남자'에서 저는 서양 광대와는 다른 한국 광대를 부각하고 싶었어요. 인간의 유희적 본능을 신명으로 끌어올려 왕조차 부러워하게 만드는 존재, 그게 한국의 광대이지요. 줄타기는 전세계에 다 있지만, 출렁대는 줄에서 뒤집기 하면서 노는 것은 한국뿐이죠. 요즘 K팝의 인기 비결도 그래요. 걸그룹 소녀시대의 어깨춤을 보세요. 그런 신명은 한국인에게만 있는 거에요."
'초분'의 정 감독은 굿판을 주로 다녔다. 방송국을 그만두고 1982년 일본에서 발표한 '사자의 결혼식'도 아깝게 죽은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 굿을 찍은 다큐멘터리다. 지금은 한국 고유의 리듬인 '삼박자'를 다룬 다큐를 제작 중이다.
이번 무대는 한국문화의집 예술감독 진옥섭씨가 기획했다. 전통예술 공연 기획ㆍ연출가이자 전통예인들 이야기인 베스트셀러 <노름마치> 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국악 고음반에 빠진 세 남자 이야기로 지난해 '반락'을 선보인 데 이어 이번엔 영화를 통해 우리 전통을 변주한다. 노름마치>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 공연 일정
3월 21일 광대와 놀다_이준익 편.
4월 4일 소리를 보다_임권택 편.
4월 18일 굿판에 살다_정수웅 편.
한국문화의집 오후 8시. (02)3011_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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