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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씨앗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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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씨앗 생각

입력
2012.02.2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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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늦어진다. 그래도 남향의 창문가에 놓아둔 화분에서 네가 새싹을 자꾸 내비친다. 바깥은 아직 한겨울이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두터워 도대체 봄이 오기나 할런지 싶은 이상한 2월이지만. 너는 참 똑똑하구나, 화분에 물을 주며 혼잣말을 해본다. 너는 언제나 내게 분명히 알아채게 해준다. 꽃잎이 시들 때 그 속에 감춰둔 꽃씨들을 머금고서 내게 다음 해를 준비하라고 보채곤 했었다. 나는 네가 건네준 그 귀한 꽃씨를 받아 정갈한 종이에 올려놓는다. 옛날식 약봉지처럼 접어 씨를 받은 날짜를 적어둔다.

씨앗이 넉넉했던 어느 해에 주변사람에게 분양을 해준 일이 있다. 누군가 “이 씨앗에 무엇이 들었나 한번 뜯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뜯어보면 어쩌나 싶어서 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무엇이 들어있나 뜯어보지 않고 심어보는 게 씨앗이라고. 그 사람이 몰라서 한 말은 아니고 순전히 농담이었지만, 일년 내내 정성 들여 키워 내 두 손으로 받은 꽃씨라서 농담을 농담처럼 듣지 못했다.

노파심에 불쑥 해버린 대답 한 문장을 가끔씩 생각한다. 며칠 전 누군가 곱게 포장을 한 선물을 내밀며 어서 뜯어보라 말하길래 또 씨앗 생각이 났다. 선물은 모름지기 이 안에 뭣이 들었을까 궁금해하며 포장을 뜯는 순간의 설렘이 어쩌면 본래의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일 것이다. 씨앗은 무엇이 들어있나 궁금해서 심어놓고 기다리는 것이고. 비교를 해보는 순간에 나는 갑자기 조금 무서워졌다. 살면서 내가, 선물인 줄 알고 뜯어본 것들이 씨앗이었다면?

씨앗이 모두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씨앗은 키작은 꽃으로 살도록 되어 있고 어떤 씨앗은 시원스레 큰 키를 지닌 나무로 살도록 되어 있다. 채송화 씨앗은 키작은 자기 운명을 알기 때문에 점처럼 아주 작고 양이 아주 많다. 연꽃 씨앗은 고인 물에서 생존할 것을 알아 껍질이 호두처럼 딱딱하게 보호돼 있다. 씨앗은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모든 씨앗이 모두 커다란 나무로만 성장하길 바라진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곧 삼월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선 새로운 여덟 살들이 입학식을 치를 테고, 1학년만큼이나 마음이 설렌 부모들이 운동장을 에워싸고 있겠지. 내 자식이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길 바라면서. 채송화는 되지 않길 바라면서.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길 바래서 아낌없이 투자를 하겠지. 마음처럼 되지 않으면 남들보다 두배 세배의 공(돈)을 들여가며 동네의 모든 학원들을 전전하겠지. 그래도 마음처럼 되지 않으면 야단치고 아웅다웅하겠지. 어떤 아이로 성장하게 될지가 너무나 궁금하고 불안해서, 돈을 내고 IQ검사를 적성검사를 심리검사를 받으러 아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겠지. 무엇하나 똑 부러지게 잘하거나 무엇하나 똑 부러지게 좋아하는 게 있는 아이일지라도, 공부마저 잘해야 한다고 몰아세우겠지. 공부는 못하는데 한쪽에만 관심이 높은 아이라면, 유능보다 무능을 더 강조하면서 애를 태우겠지. 균형 있게 골고루 잘하는 아이를 만들고 싶어서 또 아이를 달달 볶겠지. 아이를 바꿔놓고 싶어서 정신과도 데려갈 테고 남들의 갖은 조언에 귀를 팔랑거리겠지. 지금은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설레여 입학식에 카메라를 들고 서성이겠지만, 금세 씨앗을 뜯어버리듯이 아이가 채 성장하기도 전에 아이를 이리저리 뜯어놓고 말겠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그녀를 내버려둬. 씨앗을 심듯이’(이상은‘성녀’). 어른이 된 우리는 어떤 아이들도 내버려두질 않는다. 이미 사람을 도구처럼 생각해온지 오래됐으니 성능 좋은 도구로 성장하기만을 바라게 됐다. 어디를 둘러봐도 씨앗처럼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작거나 크거나, 무르거나 단단하거나 각기 다른 모든 씨앗들이 커다란 나무로만 키워지고 있다. 채송화씨도 연꽃씨도 커다란 나무를 키우는 방법으로만 키워지고 있다. 세상에 씨앗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봄은 오고 싶지가 않나 보다.

김소연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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