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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말 연습… 언어장애 딛고 이룬 강단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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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말 연습… 언어장애 딛고 이룬 강단의 꿈

입력
2012.02.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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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발음은 의외로 또렷했다. 그가 언어장애(말더듬증) 4급이란 사실을 알고 전화한 터였다. "보철물(언어보조기)을 끼고 있어서 그래요. 빼 볼까요?" 그러자 금세 그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음절이 허물어진 소리들이 소음과 섞여 공중에 흩어졌다. "보철물 없이는 대화를 할 수 없죠." 그가 다시 언어의 세계로 돌아왔다.

다음 달 초 부산 부경대 공간정보시스템공학과 교수로 부임하는 이상윤(38)씨 얘기다. 언어장애인이 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는 건 국내에서 그가 처음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교수가 강의하는 모습을 상상하긴 어렵다.

"언어장애인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단 한 마디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씨는 22일 한국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희망과 꿈을 갖고 줄곧 해나가면 장애는 반드시 극복된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특히 사고ㆍ수술로 후천적 언어장애를 갖게 된 분들은 발음을 새로 배우는 과정에서 99%가 재활을 포기하고 수화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음성 언어를 버리면 많은 걸 잃게 되죠. 절 보세요.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이 달라진 건 2006년 암 수술을 받으면서다. 2002년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졸업 후 당시 부산 용호동 지역에 남아있던 나환자촌에서 한창 야학 봉사를 하던 때였다. 얼굴 왼쪽 상악동(광대뼈 안쪽 눈 밑과 입천장 사이 공간)에서 자란 암세포가 안구 아래부터 잇몸까지 퍼지는 바람에 이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야 했다. 이 때문에 얼굴 왼편 근육이 흘러내렸고 왼쪽 안구가 비틀어지면서 오른쪽보다 3배 가량 커 보이게 변했다.

더 심각한 건 엉망이 된 발음. 왼쪽 입천장에서 안구까지 동굴처럼 구멍이 생겨 말이 새나갔다. 상대방과 대화하려면 이 구멍을 막아야 했는데 그 역할을 해 주는 게 현재 착용 중인 보철물이다. 보철물과의 싸움은 혈투였다. "보철물 두께만큼 좁아진 입 안에서 혀를 놀려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처음 1년 간은 입 속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찰로 입 안이 찢기기 일쑤인데 처음엔 오죽했겠습니까. 대부분의 언어장애인이 언어 소통을 포기하는 것도 이런 고통 때문입니다."

그는 부산대 과학기술정책 박사 과정에서 조선ㆍ해양과학기술을 정보기술(IT)과 융합하고 이를 정책으로 만드는 방안을 연구해왔다. 아직 박사학위는 없다. 올 1학기 중 학위논문을 쓸 예정이다. 그런데도 교수로 임용된 건 연구 성과가 워낙 뛰어나서다.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등재 학술지인 기술혁신학회지에 지난해 9월 그가 혼자 쓴 '한국 조선산업 연구'란 논문이 실리면서 조건이 충족됐다. 논문이 유수 학술지에 단독 게재되려면 박사학위 취득 후에도 4년 가량이 필요하다는 점에 비춰보면 그가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언어장애는 중증장애입니다. 대다수가 의사소통을 못 하는 데다 안면 기형에 따른 심리적 위축마저 심해 사회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죠.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십상입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언어장애 재활 분야가 척박한 현실을 그는 안타까워했다. "혀를 많이 굴리는 영어 발음 연습이 제겐 재활 기간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저만의 '언어장애 후 의사소통 성공 매뉴얼'이 한 편 완성된 셈이죠. 전공 연구만큼 이를 알리고 공유하는 데도 애쓸 생각입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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