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기울던 무렵의 화인(畵人)인 소치 허련(1809~1892)의 집(운림산방)은 전남 진도 땅 첨찰산 기슭에 있다. 그 집 마당에 소치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백매(白梅)가 유명하다. 엄밀히 따지면 지금의 매화나무는 허련이 심은 백매의 아들 나무다. 여하튼 2월 말에서 3월 초, 운림산방 매화나무가 꽃망울을 뱉어내기 시작하면, 긴 겨울이 떠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매화는 영춘화보다 먼저 봄을 맞는다. 지난 주말 남도의 이른 봄기운을 찾아 진도로 향했다.
목포를 지날 때까지 쾌청하던 날씨는 차가 진도대교를 넘자 눈보라로 바뀌었다. 봄은커녕 겨울의 한복판 같은 풍경이다. 운림산방의 백매도 곁의 배롱나무와 함께 딴딴한 월동의 자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진도군청 관리자에게 "올 겨울이 작년보다 추웠냐"고 물으니 "추위보다 눈이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올해는 3월 중순이나 돼야 (개화가) 될 것 같다"는 얘기. 백매의 겨울잠이 길다. 그러나 남도의 봄은 다른 곳에, 꽃나무 가지보다 낮은 높이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요?箚疵?터져서 벌어진 것은 납때기, 조것맨치로 속이 들어 있는 것은 까배기라 그래."
눈발 속의 섬이 온통 연둣빛이다. 밭 때문이다. 진도까지 오면서 본 육지의 휑뎅그렁한 밭과 달리, 진도의 밭에선 다 자란 작물을 수확해 포장하느라 일하는 손들이 분주했다. 뭐냐고 묻자 '납때기, 까배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잎이 벌어진 납때기가 속이 찬 까배기보다 오히려 상품 가치가 높단다. 서울에서 봄동이라고 부르는 배추다. 지난해 추석 지나 씨를 뿌려 수확이 한창이다. 아마도 올해 가장 먼저 수확하는 밭작물일 듯. 속잎을 한 조각 입에 넣고 씹었다. 차가운 질감 뒤에 봄의 향기가 그윽했다.
눈보다 혀로 먼저 봄을 감각하게 하는 봄동은 진도에서 전국 생산량의 약 70%가 생산된다. 다도해의 겨울 바람을 받고 자라 가을 배추보다 두껍지만, 훨씬 부드럽고 씹을수록 은은한 단맛이 난다. 생으로 장을 찍어 먹어도 되고 데쳐서 나물로 무치거나 된장국을 끓여도 그만이다. 도회지 소매가로 한 통에 1,000원도 안 되는 값에 구할 수 있는, 해풍쑥이나 달래보다 이르게 서민들의 밥상에 찾아오는 봄소식. 설 지나서부터 양력으로 3월 중순까지가 철이다. 속잎을 입에 넣어준 아주머니는 "3월 말부터는 속이 솟아부러서 맛이 나지 않아부린다"고 설명했다.
진도는 넓은 섬이다. 넓어서 부쳐먹을 땅뙈기도 넉넉해 어업보다 밭농사가 섬의 주업이다. 그런데 일할 사람이 적다고 했다. 얼어 터진 손을 불에 간간이 쬐며 박스에 봄동을 담는 아주머니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장흥 관산"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차로 30~40분 떨어진 거리다. 아주머니는 새벽 5시 30분에 농장에서 보낸 버스를 탔다고 했다. 버스는 장흥군 관산, 용산, 강진군 칠량, 도암, 해남군 황산, 문내 거쳐 일당 4만원의 아주머니들을 가득 싣고 매일 아침 진도로 온다. 식탁에 오르는 봄소식엔 이 아주머니들의 손 시린 노동이 담겨 있다.
"숭궜다가(심었다가), 캤다가, ?뭅鳴?벴다가), 몰렸다가(말렸다가)…" 1년 내내 농사일로 쉴 틈 없다는 한 아주머니의 신세 타령이 적잖이 재미있었다. 올해 일흔한 살이라는 아주머니의 말투엔 남도 가락의 구성진 리듬이 있었다. 힘겨워 보였지만, 노동은 또 흥겨워 보였다. 눈발이 거세졌다. 돌아오는 차 라디오에서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 봄의 수확으로 왁자한 남도의 밭에 내리는 폭설의 풍경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서울 쪽에서 진도로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목포IC에서 나와 영산호하구둑을 넘어 77번 국도를 타야 한다. 출근시간엔 둑길이 붐비므로 피하는 게 낫다. 매주 토요일 운림산방(061-540-6286) 경매장에서 남도예술은행 토요경매가 진행된다. 국립남도국악원(061-540-4034)에선 매주 금요일, 진도향토문화회관(061-544-8978)에선 매주 토요일 전통문화 공연을 볼 수 있다.
진도=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