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한국시간) 터키 안탈라야에서 막을 내린 2012 터키 세계3쿠션 당구 월드컵 결승전. 세트스코어 1-2로 뒤진 4세트에서도 최성원(35ㆍ부산시 체육회)은 7-12까지 밀렸다. 게다가 상대는 홈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터키의 타즈데미르 타이픈.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8점째에 성공한 이후 최성원의 한 큐, 한 큐는 경기장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무려 7점을 연속으로 뽑아 14-12로 역전에 성공한 최성원은 세트 포인트를 남겨 두고 세트당 한 번이 허용되는 '50초 타임'까지 요청하며 장고를 거듭했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1목적구를 조준한 최성원이 시도한 기술은 뒤돌려치기 대회전. 자로 잰 듯한 힘과 회전이 가미된 수구는 정확히 2목적구를 때리며 극적으로 4세트를 따냈다. 자신감을 얻은 최성원은 5세트에서 완벽에 가까운 샷으로 15점(15-4)에 안착하며 세트스코어 3-2로 극적인 역전 우승을 완성했다.
김경률(32ㆍ서울당구연맹)의 그늘에 가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최성원이 생애 첫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김경률에 이어 월드컵에서 우승한 두 번째 선수가 됐고, 세계랭킹도 종전 11위에서 개인 최고인 6위로 수직 상승했다. 21일 금의환향한 최성원은 22일 전화통화에서 "32강부터 쉬운 경기가 없었는데 마지막에 집중력을 가져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겸손해했다.
게으른 천재에서 용솟음친 자존심
최성원은 당구계에서는 이미 최강으로 꼽히는 선수. 황득희와 최재동이 90년대를 대표했다면 최성원과 김경률은 2007년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타며 '투톱'을 이뤘다. 그러나 서울당구연맹 소속의 '젊은 피'였던 김경률의 '노출 빈도'에 상대적으로 최성원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최성원을 괴롭힌 건 '게으른 천재'라는 수식어였다. "너무 훈련을 안 하는 이미지로 비춰져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죠. 그런 소리를 들은 후부터 더 이를 악물었어요."
이번 대회를 통해 드러난 그의 승부사 기질은 당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32강에서 네덜란드의 짐 파울을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따돌렸는데 결승전과 마찬가지로 1-2로 끌려가다 4, 5세트를 내리 따냈다. 16강에서는 세계랭킹 1위의 야스퍼스(네덜란드)를 3-1로 완파하는 이변을 일으켰고, 8강에서는 후배 강동궁(32ㆍ경남당구연맹)에 세트 스코어 0-2로 몰렸다가 3-2로 '역전 스윕(싹쓸이)'경기를 만들어냈다. 3-0으로 완승을 거둔 준결승에서도 2, 3세트를 스페인의 산체스(세계랭킹 5위)에게 세트 포인트에 몰린 뒤 극적인 역전으로 마무리했다. "쉬운 경기가 하나도 없었죠. 저도 사람인데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위기에서 집중력이 생기는 건 타고난 것 같아요."터키 세계 3쿠션 당구 월드컵은 매년 한 차례 열리는 대회로 세계랭킹 1~20위는 의무 참가한다. 이밖에 25개국에서 톱 랭커들이 총출동하는 권위 있는 대회다. 세계랭킹 1~12위까지 32강 본선 시드를 배정한다. 대회 참가 전 세계랭킹 11위였던 최성원은 랭킹 시드자로 32강에 직행해 역전 드라마를 써 나갔다.
무림 고수에서 태극마크까지
부산 가야에서 태어난 최성원은 당구장을 운영하던 집안의 영향으로 9세에 큐를 잡았다. 개성중과 가야고를 거치면서 당구 신동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소위 '내기 당구'로 부산을 평정했고, 그의 실력은 입 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호인 애버리지 기준으로 500점 정도 됐을 겁니다. 전문대를 다니다가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퇴하고 선수의 길로 들어섰죠."2006년 데뷔한 최성원은 곧바로 국가대표에 선발될 정도로 재야에서 키워 온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최성원의 애버리지는 1.705. 이닝 당 평균 타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 번의 기회에 평균적으로 칠 수 있는 개수를 말한다. 동호인 방식으로 환산하면 2,000점 이상으로 의미가 없다. 그의 주무기는 짧은 뒤돌려치기. 선수들도 성공률이 높지 않은 기술이지만 최성원은 백발백중이다. 최고 기록은 연속 17점. 비공식 경기에서는 32점까지 기록한 적이 있다고 한다."이제부터가 중요하죠. 지난해 프랑스에서 열린 아지피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세계 톱 랭커들의 견제가 시작되더라고요."
최성원은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지난해 결혼한 아내 김지아씨와 달콤한 휴가를 즐기고 있지만 다시 훈련에 돌입할 예정이다. 최성원은 내달 1일부터 국내 랭킹 1위 조재호(32ㆍ서울시청)와 짝을 이뤄 독일에서 열리는 내셔널 팀 3쿠션 대회에 출전한다. "세계 어디를 다녀 봐도 우리만큼 경기장 시설이 좋은 곳은 없어요. 세계 최고의 당구 동호인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답게 스포츠로서의 좋은 인식과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성환희기자 hhs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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