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분노·체념이 기분 나쁘게 도사린…
관상학적으로 길(吉)한지 흉(凶)한지 잘 모르겠지만, 약간 치켜든 턱 위의 갈매기 모양 입술(꽤 두툼하다)엔 늘 이런 표정이 걸려 있다. 노래할 때나 다물고 있을 때나. '묵!' 아마도 무뚝뚝과 침묵(默) 사이에 위치할 이 표정(데뷔 싱글 앨범 커버를 참조하시라)은, 말하자면 묵찌빠 하면서 회심의 '묵'을 지르는 자의 얼굴인데, 온통 "지지지지베베베베베베" 하는 가요시장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 묵에 대하여, 대중이 스스로 '찌'를 내고 벌러덩 자빠져버린 것이 2008년 음악계의 일대 사건으로 기록된다. '싸구려 커피'를 만든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장기하의 얼굴 얘기다. 각설하고, 오늘의 이 '명작'이 탄생하게 된 '그곳'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장기하의 대답.
"없다. 그냥 나를 아주~ 완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어떤 공간이라고나 할까…."
역시나, 묵이다.
"루저라니?"_해석의 과잉이 빚은 시대의 아이콘
개인적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모호한 이름의 밴드를 접한 통로는, 유튜브도 아니고 EBS '스페이스 공감'도 아니고, 2009년 초 몇몇 계간지와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었다. 몇 가지만 제목을 옮겨본다. '루저문화의 얼굴들_장기하와 얼굴들, 붕가붕가레코드를 중심으로'(최지선. ), '박탈과 낙오의 시대에 살아남기_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정치경제학'(이정우 등. ), '메아리, 이적, 그리고 장기하_저항문화의 계보학을 위하여'(장성규. ).
인디 밴드의 노래가 먹물들의 텍스트로 소비되는 요상한 상황. 정리해 보자면 이런 사태였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첫 번째 싱글 '싸구려 커피'를 발표한 2008년은 88만원 세대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붐업(boom up)되던 때였다. 젊다는 사실이 루저일 수밖에 없다는 조건임을 자각한 세대의 자의식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내뱉는 노랫말은 강력하고 신속하게 침투했다. "뭐 한 몇 년 간 세숫대야에 고여있는 물 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싸구려 커피')라는 인식론적 각성의 폭발. 각종 해석이 난분분했다. 장기하는 88만원 세대의 아이콘이 돼버렸다.
"아, 그랬나? 몰랐다."
이런 얘기에 대한 장기하의 반응은 다시금 심플했다. 경지에 이른 무심이거나 "마음 없는 척"('그 남자 왜')이다. 마주앉아 대화를 나눠본 감으로 판단하자면, 진짜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정황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난 스스로를 한 번도 루저로 여겨본 적이 없다"는 장기하의 자기 인식. "물론 나의 인생에서 지금이 뭔가 루징하는 시기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지만"이라고 얘기할 줄 아는 이 경우 바른 청년은, 알다시피 이 나라 권력의 상징인 서울대 출신이다. 게다가 번듯한 가정에서 자라기까지 했다. 둘째 정황은 '싸구려 커피'를 발표할 당시 장기하가 수년째 활동 중인 인디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싸구려 커피'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듣는 음악이 될 줄 정말 몰랐다. 이 시대의 조류와 나는 크게 관계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드러머 생활을 할 때부터 쭉 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해서 TV에 나오는 가수처럼 유명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클럽에서 공연했을 때 사람들이 좋아할 음악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유명해졌다. 9시 뉴스에도 나오고. 뭐 나는 전혀 생각도 안 했는데 그런 (루저문화) 해석을 하는구나, 하고 신기하게 느꼈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나중에 그런 뉴스를 보고 알게 됐고."
요컨대 장기하와 얼굴들은 어떠한 의식으로 무장한 사회적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1g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싸구려 커피'가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은 록 음악이 가진 숱한 부작용 가운데 하나일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자신들의 노래가 혹 사회적 인식체계 구축의 도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이를테면 미필적 고의라도 장기하에겐 있지 않았을까. 장기하 왈, "뭐,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사로 만든다고 해서 남들이 들을 때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느낌만 든다면 음악적으로 가치가 없는 가사라고는 생각한다. 근데… 미필적 고의가 뭐냐?"
"기분이 나쁘니까"_싸구려 커피를 마시던 공간
여하튼 '그곳'의 물리적 위치를 최대한 구체화해서 박아야 한다는 게 이 한 면짜리 기획 기사 시리즈의 근원적 한계. 최대로 구체화한 장기하의 대답은 "뭐 굳이 따지자면 노래를 만들 때 내가 있던 곳은 군대"라는 것 정도다. 1집에 있는 많은 곡들, 그러니까 '달이 차오른다, 가자'나 '별일 없이 산다'도 군 생활 중에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싸구려 커피'의 배경이 군대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장기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얘기는 굉장히 많은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라 이제 나도 진위가 의심되긴 하지만"이라는 전제를 달고서.
"20대 들어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 사건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기억도 안 나지만. 지금까지 해온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것 같고, 생각했던 것만큼 내가 괜찮은 사람이 아닌 것 같고…. 허무하고 불안한 기분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언젠가부터는 되게 익숙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고. 그래서 통기타를 잡고 그 기분을 노래로 만들어 봤다. 그게 '싸구려 커피'다."
우울과 분노와 나른한 체념이 섞여 젊음을 잠식하고 있는 공간들이 모두 '싸구려 커피'의 그곳인 셈인데,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지는 "눅눅한 비닐 장판"의 공간만은 아마도 특정할 수 있을 듯. 장기하는 "나는 비닐장판이 깔린 집에서 살아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것은 군대 내무반에 빚진 소재다. 신성하다는 국방의 의무를 강요 받는 공간마다 깔려 있는 오래된 노란색 장판.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라는 노랫말을 낳은 그 노란색 트라우마는, 2007년에 전역한 예비역 병장 장기하의 몸 속에 살아 있었다.
"(군대에서 작곡 많이 했으니) 예비군 훈련 가면 또 좋은 곡 만들 수 있겠다고? 걍 좋은 곡 안 만들고 만다. 면제만 받을 수 있다면 곡 몇 개쯤 포기하겠다! (군대에서) 정말 미쳐버릴 것 같지 않았나?"
"라b시도라파파"_한국어의 음악적 복각을 위하여
단답형에 가까운 대답으로 질문을 쳐내는 게 꼭 수비수가 골 라인 근방의 공을 걷어내는 것 같다. 그러던 장기하가 한 질문에서 헤맸다. 1집 수록곡 '별일 없이 산다' 중 "별일없이산다" 여섯 음절의 음계를 물어봤을 때였다. "'시#(샵)도레시파파'였던가…" 하면서 꼬이는 스텝. 슛 타임이다. 민감할 걸 좀 캐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건 그냥 넘어가자니까, "이런 게 정말 중요한 질문"이라면서 끝까지 붙들고 끙끙댔다. 곡을 쓰는 뮤지션의 자존심인 듯. 마침내 기억을 해냈다. "별일없이산다"는 F키(key)의 "라b(플랫)시도라파파"였다.
"아까 산울림의 영향 얘기 하지 않았나. 사실 1970년대 음악은 눈뜨고 코베인에 들어가고부터 들었다. 그 밴드가 모범으로 삼은 밴드가 산울림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세뇌된 거다. 듣다 보니 정말 좋더라. 뭐랄까. '노래를 만들 때는 언어 자체의 운율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 음악의 요지인 것 같다. 송골매도 마찬가지고. 1970년대에 한국말로 만든 노래에 한국어가 가진 본질적인 리듬감이 있다. 지금껏 내가 곡을 만들며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것이다. '싸구려 커피'나 '별일 없이 산다'를 만들 때도 그런 말의 뉘앙스를 담고 싶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독특하면서도 낯익은 감성에서 흔히 산울림이나 송창식의 아우라가 얘기된다. 하지만 그것을 음악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분석을 찾긴 쉽지 않다. "김창완이라는 싱어송라이터는 한국어의 말맛을 살릴 뿐 아니라 특이하게도 훨씬 더 (그것이) 살아나는 음악을 했다"는 장기하의 말에서, 그건 단순한 스타일의 모방이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태도의 복각(復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힙합이나 슈게이징(shoegazing)을 할 것 같은 1982년생이 포크록을 한다는 사실이 퍽 대견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것 아닐까. 사람들이 키치적 유머를 읽어내는 대목에, 어쩌면 가장 진지한 음악적 고민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요새 (2집 활동 마치고) 노느라고 안 보던 TV도 보는데, 예능 프로그램 보면 그런 걸 느낀다. 아, 저 형님들은 정말 한 주 한 주 지나며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마냥 웃고 떠드는 것 같아도 사람들 눈엔 그 모습이 보인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도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게 일상적이고 내가 흥미를 느끼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겠지만, 그게 다른 사람이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노래였으면."
유상호기자 shy@hk.co.kr
■ 한국 음악 다양성의 보루, 인디 레이블
장기하와 얼굴들이 속한 붕가붕가레코드 같은 인디 레이블은 SM엔터테인먼트로 대표되는 아이돌 스타 시스템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다. 자본의 공세에 맞서 거의 '가내 수공업'의 형태로 음악의 한 축을 지켜내고 있는 한국 인디 문화의 산실이다. 홈레코딩 제작시스템이 본격화한 10여년 전부터 매년 수백 장의 음반을 내고 있다. 소규모인 만큼 음반 프로듀싱뿐 아니라 기획도 함께 한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디 레이블은 30여곳 정도다. 붕가붕가레코드는 장기하와 얼굴들뿐 아니라 눈뜨고 코베인, 미미 시스터즈, 불나방스타 쏘세지클럽 등의 스타급 인디 뮤지션이 소속돼 있다. 브로콜리 너마저도 이곳 출신. 루비살롱 레코드도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갤럭시 익스프레스, 국카스텐 등의 음반을 기획ㆍ제작한다. 이곳 뮤지션들은 당장 대형 록콘서트에 오를 수 있는 실력파들이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등의 보금자리였던 드럭 레코드, 보드카레인이 활동하는 뮤직커벨, 킹스턴 루디스카가 자체 설립한 루디시스템, 허클베리핀의 샤레이블 등도 주목 받는 레이블들이다. 이제 인디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짙은, 요조 등의 스타와 막시밀리언 헤커 같은 해외 스타의 음반을 제작ㆍ판매하는 파스텔뮤직도 있다.
인디 레이블에 관심을 가져야 이유는 이들이 실험적이거나 풍자적인 음악, 시장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다양성의 음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데뷔 싱글 '싸구려 커피'도 공CD를 사서 손으로 하나씩 만든 것이다. 수익성을 따지면 불가능한 시도다. 인디 레이블들은 2008년 '서교음악자치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레이블 마켓 등 공동 사업을 벌이고 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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