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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성공한 맏아들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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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성공한 맏아들의 배신

입력
2012.02.2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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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이 포퓰리즘 바람이 언제쯤 잦아들까요?"라고 물었다. 그의 물음에는 청와대와 여당까지 나서서 연일 대기업을 향해 '몽둥이질'을 하는 요즘 상황이 임박한 선거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한시적 제스처일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듯했다. 잠시 망설이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을 각오하고 생각을 밝혔다. "정치권의 대기업 공격은 중산층ㆍ중소기업의 쇠퇴와 질 좋은 일자리 부족 등 대기업 위주 경제성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국민적 공감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없는 한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달 출간된 유진수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의 은 확산되고 있는 대기업 반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거를 제시해 눈길을 끈다. 축약하자면 '혼자 힘으로 성공한 사람도 어려운 형제들을 도와야 한다는 구성원으로서의 연대 의무를 느껴야 마땅하거늘, 형제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혼자 고등교육을 받아 성공한 '가난한 집 맏아들'이 힘든 형편의 형제를 모른 척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맏아들이 형제들에게 나눠주어야 할 성공의 몫은 둘째나 셋째가 고등교육을 받았다면 모았을 재산과 그들이 현재 보유한 재산의 차액만큼이라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형에게 양보하느라 놓쳐버린 동생의 가능성까지 형이 보상할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대기업이 이런 '가난한 집 맏아들'처럼 성장해 왔다. 60, 70년대 물가가 1년에 20% 내외나 뛰던 시절 대부분 국민들은 인플레에 한참 못 미치는 소득 증가율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제대로 먹고 입지 못하는 '강제 저축' 상황에 몰려 있었다. 반면 대기업은 정부가 조종하는 은행 대출을 통해 강제 저축된 부를 가져갈 수 있었다. 실질금리(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것)가 한해 마이너스 50%를 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한 80년대 이후에도 정부 지급보증, 세금감면, 수입제한, 노조탄압 등 특혜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나라 대기업이 이런 특혜 속에서 성장한 '가난한 집 맏아들'이라는 사실은 외국인들도 잘 안다. 우리나라에서 방영되는 영국 BBC 자동차 소개 프로그램 '탑 기어'의 진행자는 최근 현대자동차가 해외시장에서 잘나가는 비결이 "현대차의 한국시장 점유율이 80%에 달하고, 한국에서 축적한 독점이윤으로 해외에서 과감한 마케팅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얘기를 듣고 "80%라고? 말도 안돼, 오늘날에도 그런 독점이 존재할 수 있어?"라며 놀라던 보조 진행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오랫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치부를 들킨 듯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한 대기업은 "이젠 성공의 몫을 공유하자"는 요구가 제기되면 "경제원리를 모르는 주장으로, 결국 시장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어려운 말로 일축한다. 또 "자꾸 발목을 잡으면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위협도 곁들인다.

이런 반응에 국민들의 마음은 얼어붙는다. 새누리당의 최근 여론조사결과 "대기업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 사람은 18.5%에 불과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나"라는 질문에도 긍정적 응답은 22.8%에 그쳤는데, 두 질문 모두 6개월 전 조사 때보다 부정적인 반응이 3~6%포인트 늘어났다.

역사를 반복할 수 없는 한 맏아들의 성공의 대가로 희생한 동생들의 재산가치가 얼마인지 산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20세기 후반부에 우리나라가 대기업 위주 성장 전략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혹은 얼마나 덜 성장했을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나라의 기업보다 많은 특혜 속에 성장해 왔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기업이 그 동안 국민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면, 그리고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고 행동해왔다면 오늘날과 같은 여론의 질타를 받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이 하루빨리 '무책임한 가난한 집 출신 맏아들'의 이미지를 벗을 방법을 찾기 바란다.

정영오 경제부 차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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