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법부는 위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법부가 과거 행정부의 어느 부서처럼 있다가 없어지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위기인가. 다름이 아니라 사법부 권위의 위기요, 판사 권위의 위기다. 판사야 말로 '권력'이 아닌 '권위'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헌법기관일터이다. 국회의원처럼 막강한 보좌관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행정부의 수장들처럼 부하직원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혈혈단신으로 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업무다. 이런 판사의 업무가 막중한 이유는 사람들간의 시비를 정확하게 가리는 문제를 엄정하게 하지 않으면 분란이 나고 결국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존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론자는 공정한 재판의 필요성 때문에 정부가 생겼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판사가 재판을 했을 때 권위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오랜 심의 끝에 판결을 내렸을 때 당사자들이 그 판결에 승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판을 받는 당사자로부터 승복을 이끌어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판사의 권위다. 부모의 권위가 없다면 어떻게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들을 수 있으며, 성직자의 권위가 없다면 신자들이 어떻게 성직자의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재판을 하는 판사권위의 존재 이유다.
이 점과 관련,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지은 '오레스테이아'가 압권이다. 주인공인 오레스테스는 트로이를 정복한 그리스 아가메논 왕의 아들이다. 아가메논 왕은 트로이 10년 전쟁 끝에 트로이를 정복하고 그리스로 돌아오지만 그의 아내인 클리템네스트라에 의해 살해된다. 남편이 트로이로 함대를 지휘하면서 출정할 때 바람이 불지 않자 자신의 일곱 살 난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쳐 희생한 것에 한을 품고 있다가 개선한 남편에게 복수를 한 것이다. 그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죽이는 천륜의 범죄를 저지른다. 어머니를 죽인 후 복수의 여신들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자 견디지 못하고 아테네 여신에게 달려와 그의 도움을 요청한다.
이 때 아테나 여신은 살인자를 판결하는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 열 명의 배심원을 선택한 후 오레스테스를 논죄하도록 한다. 결과는 가부동수였다. 이 때 아테나 여신은 그 특유의 권위로 흰 돌을 던져 오레스테스의 무죄를 선언한다. 물론 복수의 여신들은 격렬히 반발했으나 결국 아테나 여신이 가진 권위에 승복하게 된다.
이 '오레스테이아'의 이야기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것은 아테나 여신의 권위가 지금처럼 한국의 판사들에게 요구되는 상황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사법부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다. 누가 판사의 판결에 승복하는가. 재판을 받는 사람마다 그 결과를 보고 앙앙불락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감이 왜 이토록 커진 것인가. 영화 '부러진 화살'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부러진 화살'은 불신받는 사법부의 권위를 반영하는 것일 뿐, 그것 때문에 판사의 권위가 추락한 것은 아니다. 판사의 권위가 추락한 이후에 '부러진 화살'이 흥행에 성공한 '선후관계'일뿐 '부러진 화살' 때문에 판사의 권위가 실추한 것과 같은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말이다.
원래 판사들의 판결에는 불확실성이 있다. 축구심판이 아무리 열심히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심판을 봐도 오심을 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솔로몬왕이나 다니엘이 아닌 이상 판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죄없는 사람을 유죄로, 죄있는 사람을 무죄로 오판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사법부의 정의가 '완전 정의'가 아니라 '불완전 정의'에 속하는 이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성에도 불과하고 판사의 권위가 살아 숨쉬려면 판사는 구도자처럼 살아야 한다. 정의의 여신처럼 눈을 감아야 하고 직무상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판사 자신도 입이 있고 생각이 있다고 하여 정치사회 현안에 대하여 말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겠다며 비밀을 누설하게 되면 판사와 사법부는 벌거숭이가 된다.
지금 우리 판사들은 어떻게 환골탈태할까 고민을 해야지 집단행위를 할 때가 아니다. 동안거에서 면벽수행하는 구도자처럼 "내 잘못은 무엇인가" 하고 반성할 때이지 "우리에게도 할 말이 있다"며 항변할 때는 아닌 것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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