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에 소장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세계 명화 중 최고 반열에 드는 이 그림은 1486년께 탄생했다. 벌써 500년을 훌쩍 넘는 삶을 살았고, 대참사가 없는 한 앞으로도 오래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물이 영고성쇠 하는 자연의 시간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그 아름다운 표면에는 균열이 가고, 색채는 바래간다. 그러나 이 명화는 지난해 초 구글이 만든 온라인미술관 '구글 아트프로젝트(www.googleartproject.com)'에서 70억 픽셀의 초고화질이미지로 전환돼 디지털 생을 시작했다. 인간 망막을 넘어서는 가상의 피부와 몸으로 극 미립자의 미를 뽐내며.
자연이 사건을 결정하던 시대가 종언을 고한지 오래다. 자연의 운행과 삶의 대소사가 동일한 궤도로 도는 메커니즘은 사회 전 영역에 첨단 테크놀로지가 침투하면서 멈췄다. 우리는 이제 강력한 전력 체계 덕분에 햇빛과 아무 상관없이 일하고, 온갖 육성정책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생산과 소비를 거듭하며, 눈부신 통신기술에 힘입어 24시간, 365일 항시대기 온라인 상태 속에 산다. 보라. 새벽 4시 수백 개 형광등이 켜진 커피전문점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당신을. 화장실 변기 물을 내리는 와중에도 아랑곳없이 울리는 우리의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을.
디지털 기술이 물리적 시공간의 조건을 넘어서면서 '뉴스'는 더 이상 매스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먼 곳의 특별한 소식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나나 당신이 언제 어디서나 만들어내는 우리 삶 전체가 되었다. 예전이라면 알려지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지엽적인 사실들이 삽시간에 트위터를 타고 퍼져나간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향한 단순 의사표시에 불과했던 말이 SNS를 통해, 또한 그것을 받아 기사를 쓰는 대중매체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는 가운데 모든 것이 순간에 출현했다가 사라지고, 급부상했다가 한 방에 스러진다. 물론 그 반대 사례도 넘친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우리가 개입해서 만들어낸다고는 해도, 절대적으로 우선하거나 항구적인 일도, 주체도 없는 '순간적이고 상대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나.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판해서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정치판까지 뒤흔드는 괴력을 과시한 '나는 꼼수다'가 최고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그와 동시에 일명 '비키니 시위' 등의 논란으로 급속히 소강상태를 맞은 것도 우선 SNS 사용자들의 디지털 시공간 속에서다. 영화 '도가니'의 원작자로 온 국민의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공지영이 각종 구설수에 휘말리며 지지와 힐난의 파도를 타고 있는 곳 또한 거기다. 비단 이뿐인가. 운 나쁘면 좀 전에 내가 140자로 말 줄여 올린 전시 평이 예상 못한 곳까지 리트윗 돼 이내 비난으로 되돌아온다. 또 운 좋은 누군가는 몇 몇 음식 사진을 올리고는 어느새 '음식평론가'가 되어 공중파에서 한 말씀할 자리를 얻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언제나 이미 불특정한 존재로 대체된다. 또 숙련된 노동이나 고도의 전문성은 도박판의 운만큼이나 부질없어진다. 그럼에도 우리 대부분은 이런 현상이 스쳐 지나는 일상의 일부려니 한다.
시간의 굴레 속에서 사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라 할 때 각자가 자율과 독립의 시간을 살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어떤 특정 기술의 메커니즘이나 기제가 호불호를 결정짓고, 자신의 판단과 행위를 앞질러 부지불식간에 특정 방향으로 일을 종결 내버리는 오늘의 시간적 현상은 자명하지 않다. 시간이란 돌아가는 대로 두면 매우 난폭해지는 무소불위의 존재다. 그래서 이제까지 사람들은 자연의 시간에 개입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디지털의 시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술계가 디지털 문서고화에 힘쓰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동종요법 식 대처의 예다.
강수미 미술평론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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