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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모든 게 게임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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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모든 게 게임 때문이라고?

입력
2012.02.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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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노무현 탓"이었던 적이 있었다. 요즘은 "모든게 MB탓"이라고들 한다. 어찌 모든 것이 대통령 탓이겠는가? 이 얘기를 하는 사람들조차 이것이 과장스런 유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모든게 게임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진지하게 말한다. 농담으로 보이지 않는다. 자살도 성폭행도 학교폭력도 게임 때문이라 주장한다. 게임만 없어지면 정말 우리나라 학교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19세기 유럽에서 통속소설이 인기를 끌자 신문들은 소설이 모방범죄를 유발한다며 비난을 퍼부었지만, 얼마 후 신문들은 더 선정적인 연재소설을 실어 독자들을 유혹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신문들은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며 비판했지만, 30~40년이 지난 지금 잘나가는 신문사들은 앞 다퉈 방송사를 만들고 사람들을 TV 앞으로 부른다. 이제 신문은 게임을 새로운 적으로 만들어 죄목을 붙이고 형벌을 내린다.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나 극단적 사례 몇 개를 근거로 삼아 전능한 목소리로 외친다. 게임은 흉기다. 게임을 두려워하라.

이 외침의 뒤편에는 정부가 있다. 학교 폭력과 게임을 연결 짓는 프레임을 창안하고 유포시킨 주체는 교육과학기술부이다. 근거는 박약하다. 게임을 하면 짐승의 뇌가 된다고 주장하는 모리 아키오 교수의 연구는 허점투성이라는 비판 속에 학계에서의 지지를 잃었고, 폭력적 게임이 게이머의 폭력성을 증가시킨다는 주장도 상반되는 연구결과들이 반복되면서 대다수 학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왜 "게임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하는가.

학교 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책임을 떠넘길 대상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승자독식의 학교문화, 실패만 거듭하는 교육행정, 모범적 어른사회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무책임과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회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동시에, 청소년들은 자기통제력과 의사결정권이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임신을 부추긴다"는 주장과 "게임이 학교폭력의 원인이다"는 주장은 일란성 쌍생아이다. 또 하나. 세간의 추측이 맞다면, 돈 잘 버는 게임회사들을 겁박하고 얼러서 예산도 좀 확보하고 자기 부처의 '나와바리'도 넓히려는 욕심이 있을 수도 있겠다.

분명히 하자. 게임은 40년 전의 TV이다. 청소년들에게 대표적인 (혹은 현실적으로 유일한) 여가문화이자 특별날 것도 없는 일상이다. 식사도 일상이지만 음식이 언제나 몸에 좋은 것은 아니듯, 게임도 누구에게는,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게임이 경쟁중독, 점수 만능주의, 엄친아 강박증보다 더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국가가 법률이라는 무기를 들고 가정과 교실 안으로 진입해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게임보다 더 폭력적으로 보인다.

작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게임이 책, 연극, 영화와 마찬가지로 예술로 정의되고 보호받아야 한다면서 미성년자에게 일부 게임 판매를 규제하는 법률을 무효화시켰다. 이 판결을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이제 게임은 예술이 되었다"고 천명했다. 미국에서는 예술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흉기로 정의되는 현실은 누가 만들었는가. 닌텐도DS라는 게임기가 인기를 끌자 왜 우리는 이런걸 못 만드냐고 대통령이 한탄을 했던 나라다. 작년에 게임을 수출해서 2조4,000억원의 외화를 벌어온 나라다.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 돈 벌어오는 '게임산업'일 때는 큰 소리로 칭찬하지만 청소년들의 '게임문화'일 때는 앞장서서 흉기 취급을 하는 이들. 청소년들의 절절한 일상에는 무감각한 정부와 언론이 있는 나라이다.

정말 게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부모나 선생님이 아닐지도 모른다. 게임이 없어지면 학교폭력의 핑계를 찾지 못해 당황할 관료들, 게임이 없어지면 청소년을 야단칠 명분이 줄어들어 안타까워할 계몽적 '어른' 미디어들. 이들이야말로 게임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아닐까. 공포의 생산과 유포는 자신들의 공포를 숨기기 위함이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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