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니면 과제할 시간도 없어요."
서울 강남구 대치동 모 고교 1학년생이 학업 부담으로 투신자살한 지 하루 만인 15일 낮 12시40분 대치동 한 패스트푸드점. 햄버거를 물고 정신 없이 수학문제를 풀고 있던 윤모(17ㆍ강남 D고1)군이 서둘러 짐을 쌌다.
봄방학 기간이라 학교에 가지는 않지만 윤군의 하루는 숨 돌릴 틈 없이 바쁘다. 이른 아침 집에서 과외수업을 받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 윤군은 이어 수학학원 강의를 들었고, 점심 식사를 재빨리 해치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는 "오후엔 영어 전문학원 수업을 듣고 국어 전문학원에서 방학 특강과 논술 수업도 들을 예정"이라며 "오후 8시부터는 다른 학원에서 과학탐구 그룹과외도 잡혀있다"고 설명했다. 밤 10시가 넘으면 인근에 있는 학교 자율학습실로 가서 자정까지 공부를 한다고 했다.
윤군의 하루는 대한민국'교육특구' 대치동에선 낯선 모습이 아니다. 수백개 단과 전문학원이 몰려 있는 이곳에서 학생들은 과목마다 입 소문난 명문학원을 찾아 수강신청을 하듯 학원 시간표를 짜고,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한다. 앞서 윤군과 다를 바 없이 매일 학원 4곳을 순회하고 있는 김모(17ㆍ강남 H고1)군은 "남들도 다 하는 걸 나만 안 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고2 때까지 상위권을 유지하지 못하면 원하는 대학에 가기도 힘들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급하다"고 말했다.
이 지역 학생들이 이처럼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최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공부가 힘들다. 학원 다니기가 힘들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고 14일 대치동 M아파트에서 뛰어내린 A(17)군은 자신이 다니던 자율형 사립고에서 전교상위 50위권에 들던 우수한 학생이다. 지난해 12월에는 강남구 모 고교 1학년 B(17)군이 기말고사를 앞두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집 인근 아파트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B군은 강북 지역 학교에서 전학을 온 뒤 엄격한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수 차례 벌점을 받는 등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한달 앞서서는 강남권 한 학교에서 1학년 C양이 학교 수업 도중 갑자기 4층 교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당시 기말고사를 앞두고 학업 스트레스에 우발적으로 뛰어내렸던 C양은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대치동에서만 10년 넘게 영어 전문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강모(43)씨는 "입시제도가 바뀌면서 학생들이 다각도로 압박을 받고 있다"며 "예전엔 영수, 그 중에서도 수능만 잘 보면 좋은 대학에 갔지만 수시선발 비중이 높아진 지금은 저학년 때부터 준비할 게 늘어나 더 많은 학원을 다니면서 녹초가 된 학생들을 많이 본다"고 말했다. 과거 고3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대입스트레스가 고1ㆍ2까지 확대됐다고 보는 입시전문가들이 많다.
근본적으로는 지독한 경쟁사회가 낳은 부작용으로 집단 괴롭힘 같은 학교폭력과 함께 동전의 양면성을 보인다는 분석도 있다. 오성삼 건국대 교육학 교수는 "치열한 경쟁구조 속에서 한편에서는 약자를 타깃으로 삼아 괴롭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극심한 학업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라며 "이를 견디지 못한 아이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철현기자 k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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