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저축은행 사태는 피해자 대부분이 서민들이라 더욱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온 나라가 분노하고, 저마다 나서 관련자 엄벌과 신속한 피해 구제를 촉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시류에 편승하려고 너무 나갔다. 예금보장 한도 5,000만원을 넘는 피해까지 보상해 주겠노라는 대책 없는 약속을 했고, 총선이 닥치자 빼도 박도 못하고 예금보험제도의 근간을 뒤흔들 저축은행특별법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최근 여야 합의로 특별법을 합의 처리한 국회 정무위원회 얘기다.
법안 처리 자체보다 더 화가 나는 건 사안의 본질을 호도하는 정치권의 기만적 태도다.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장인 허태열 새누리당 의원은 비판적 여론에 대해 "특별법은 결코 포퓰리즘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저축은행 최대 피해지인 부산 출신인 그는 "정부가 책임이 없다면 몰라도 이미 국정조사특위 등에서 정부가 정책 오류와 감독 부실 책임을 인정했다"며 "따라서 예금보험공사가 (추가적인) 보상재원을 부담하는 건 (정부의) 자기책임 원칙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누구도 정부 책임이 없기 때문에 특별법이 잘못됐다고 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정부의 잘못을 성토한다. 다만 특별법의 잘못은 그것이 아무런 원칙도 없이 금융시스템의 근간을 훼손한다는 것과, 정치권이 선심을 쓰려고 사태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납세자의 혈세를 얼렁뚱땅 쌈짓돈 쓰듯 하려는 것이다.
일부 정무위 국회의원들은 피해자들의 피눈물을 입에 올리며 호소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18대 국회 정무위가 서민의 피눈물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면 지난해 이래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킨 금융권의 부당하게 높은 대출금리 문제를 단 한 번도 정색하고 따지지 않은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무책임한 '표퓰리즘' 경쟁에서 저축은행특별법은 단연 대표선수가 됐지만, 민주당이 시작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시위도 이에 못지않다.
모든 무역협정은 당사국의 산업 발전 정도에 따라 무수한 득실(得失)이 교차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주장대로 한미 FTA가 양국 간 득실의 균형이 깨진 불공정 협정이고, 용납하기 어려운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다면 재협상도 추진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국내 제1 야당이 비준 과정이 끝난 FTA의 발효 중지 요청 서한을 독단적으로 미국 측에 보내고, FTA 폐기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는 건 심각한 탈선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민주당은 한미 FTA 비준안을 단독 처리한 여당의 원죄를 언급하지만, 야당 역시 당시엔 은근히 여당의 단독 처리를 유도한 측면이 없지 않은 만큼 이제 와서 비준에 대한 완전한 면책을 주장하는 것도 새삼스럽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는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로부터 '주권국의 자존심을 짓밟는 무례한 요구'를 당한 적이 있다. IMF 구제금융 협상 타결 직후 정권이 바뀌더라도 IMF와 합의한 프로그램을 그대로 이행하겠다는 각서를 당시 3명의 대통령 후보에게 각각 제출토록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같은 식이라면 우리의 국정 일관성에 대한 대외 신뢰도는 물론 국가의 체모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대외 조약에서 상대국이 우리 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고 여야 모든 정파의 이행보장 각서를 요청하는 굴욕이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총선을 앞두고 복지, 교육, 고용, 서민생활 등에 걸쳐 '안 되면 말고'식의 '표퓰리즘'정책이 난무하고 있다. 거기에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정치권 나름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믿고 애써 자위하곤 했다. 하지만 궤도를 완전히 벗어나는 정치권의 탈선은 너무 심하다. 대의정치의 신뢰를 스스로 훼손하는 이런 행태야말로 타락한 정치의 전형으로 남을 것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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