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미술가 가운데 화가 혹은 조각가 등 하나의 타이틀만 고수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 작품에 어울리는 매체를 다양하게 실험하기 때문인데, 반대로 작품마다 두려움 없이 매체를 바꾸는 작가도 드물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인 여성의 벗은 몸에 비너스의 두상을 얹은 '여신들' 사진 시리즈로 잘 알려진 데비 한(43)씨는 짧게는 3년 길게는 8년까지 이어지는 시리즈마다 다른 매체를 사용하며 세상과 소통해왔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8년 전 한국에 정착한 그는 해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회화, 조각, 도예, 사진, 설치 등을 넘나드는 그에게 중국의 한 큐레이터는 '신 개념 미술가'라는 타이틀을 붙여줬다.
"전 그냥 창작하는 미술가예요. 작품을 시작하는 시점과 주제에 가장 적합한 매체를 찾기 때문에 다음에 무엇을 택할 지는 저도 몰라요. 사진은 이 시대를 대변하는 매체라 남들이 안 하는 방식으로 해보고 싶었고, 도예는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소재로 연구하게 됐죠."
서울 성곡미술관에서 10일 개막한 '비잉(BEING): 데비 한 1985-2011'전에 맞춰 만난 한씨는 자신이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주제를 "얼마나 신선하고 강렬한 시각적 미술로 보여줄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는 26년간 이어온 그런 고민의 과정과 결과물을 보여주는 중간 회고전 형식으로 60여 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의 작업을 아우르는 주제는 전시 제목 그대로 'Being'(존재)이다. "저의 내면과 정신 세계에서 시작해 개인과 사회의 연관성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작업의 공통분모를 생각해보니, 결국엔 존재에 대한 탐구가 제 작업을 지탱하고 또 변화시키는 요소더군요."
전시는 1층부터 3층까지 시간을 거슬러가는 방식으로 꾸며졌다. 1층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백자 조각들을 직육면체 유리관 속에 탑처럼 쌓은 '인식의 양'이다. 그동안 백자 비너스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패한 것들이다. "7년간 청자와 백자로 비너스상 130점을 구웠는데 10개만 온전히 남았어요. 예술가의 역할이 장인처럼 근사한 완성품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의 출구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금파리들을 처음으로 전시했습니다." 지난한 작업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은 온전한 비너스상보다 더 강렬하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2층에는 나전을 소재로 대중소비문화를 비판하는 '스포츠 비너스' 시리즈, 길바닥에 거대한 포댓자루처럼 버려진 콘돔으로 성 소비 문화를 비꼰 '콘돔' 시리즈가 자리한다. 3층에선 초기 작품인 다수의 추상 회화를 만날 수 있다.
새로운 매체 실험은 몸의 고통을 수반한다. 한국의 천편일률적인 미대 입시제도를 비판하는 '지우개 드로잉' 시리즈는 한 달 넘게 만든 지우개 가루를 핀셋으로 하나하나 집어 캔버스에 붙이는 인고의 시간을 거쳤다. 석고상 표면처럼 매끄러운 몸이 인상적인 '여신들' 시리즈 사진은 모공과 잔털까지 없애는 섬세한 컴퓨터 작업이 필수다. 지금은 컴퓨터 테크니션을 쓰고 있지만 초반엔 마우스로 직접 모든 작업을 하느라 어깨를 많이 상했다.
철학적 사유가 다분한 작품을 몸으로 부딪히며 완성해가는 과정은 1층과 2층 사이 발코니에서 영상으로 상영된다. 작업실에서 흙물을 만들고 틀에 비너스 두상을 찍어낸 후, 코와 입을 잘라내고 그 위에 흑인이나 동양인의 이목구비를 다시 조각하는 일련의 작업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전시는 3월 18일까지. (02)737-7650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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