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노란 조각보 위에 고운 한지로 옷을 입힌 여인이 서 있다. '종이부인' 작가로 알려진 정종미(55ㆍ고려대 교수)씨의 '미인도'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대한 오마주랄까. 조선시대 한국 여성의 고전미와 우아미를 고스란히 재현했지만 종이 옷을 입은 여인의 자태는 한층 입체적이고 현대적이다.
2009년 '역사 속의 종이부인'으로 명성황후, 황진이 등 한국사의 실존 여성 11인을 한지로 재현했던 정씨가 15일부터 서울 팔판동 갤러리 인에서 관객과 만난다. 신작을 포함한 25점으로 구성된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보자기 부인'전이다.
한지를 직접 제작해 자연 염색하고, 오리고 접고 붙이고 꼬는 등 한지의 다양성을 실험해온 정씨는 1999년 이후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한지와 여성성을 결합한 한국 여성 인물화 작업에 매진해왔다. 이번 전시에는 한발 더 나가 자애로운 부처의 이미지를 한국 여성에 접목한 작품들을 다수 내놓았다. '오색 보살' '수월관음도' '아미타여래도' 등 고려불화 속 부처의 자태에 평온하고 단정한 한국 여성의 얼굴이 겹친다.
천주교 신자인 정씨가 부처에서 여성성을 발견한 데는 어릴 적 경험이 녹아있다. "어릴 때 우리 형제를 키워주신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셨어요. 의사였던 아버지가 길에 쓰러진 할머니를 모시고 와 함께 살았어요. 할머니를 통해 한국 여성들이 굉장히 강인하고 이해심과 포용력이 크다는 걸 느꼈죠. 이는 한지의 물성과도 닮았지만, 부처의 이미지와도 닿아있죠."
이번 전시에는 길이 20m의 대작 '조각보를 위한 진혼곡'도 선보인다. 정씨는 "굴곡진 역사 속에서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한국의 모든 여성들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작업인 바느질을 상징하는 조각보와 그 위에 매듭을 지은 오방색의 한지가 벽에서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것이, 마치 서낭당처럼 이승과 저승을 가로지르며 원혼을 위로하는 듯하다. 전시는 3월 10일까지. (02)732-4677~8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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