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신소장품 2010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가 열렸다. 미술관이 2010년 국ㆍ내외에서 수집한 예술 작품 48점을 공개, 보고하는 자리다. 이 가운데 관람객들의 시선을 잡는 작품이 있었다. 중견 조각가 정보원(65)씨의 '메소몰픽 스페이스(Mesomorhpic Space)'. 전기적 효과로 빛의 투과 등을 조절할 수 있는 투명물질인 리퀴드크리스털(액체이면서 고체 성질을 가지고 있는 신소재 물질)로 만든 것으로 조각과 영상이 결합된 현대조각미술품 중 하나다. 미술관 측은 이 이색적인 작품에 대해 "새로운 매체를 활용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중견 작가를 향한 신진 건축가의 도전
6월까지 두 달 간의 전시가 끝난 3개월 후, '메소폴픽 스페이스'에 대해 공동저작권을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됐다. "아이디어 탄생부터 정 작가와 서로 생각을 공유해 가면서 만든 완벽한 공동저작물인데 정 작가가 저작권을 부인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씨를 상대로 공동저작권확인청구소송을 낸 당사자는 은진표(36)씨. 그는 조각가가 아니라 건축가다.
은씨의 주장에 따르면 은씨와 조작가 정보원씨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다. 비록 분야는 달랐지만, 정씨가 리퀴드크리스털로 만들어지는 조각 작품에 관심이 많아 미국에서 같은 소재의 건축 예술 작품을 만들던 은씨와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법적 다툼의 대상이 된 작품의 시작도 정씨의 제안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은씨의 소송 대리인인 박형연 변호사(법무법인 코러스)는 "2009년 초 은씨의 작품을 본 정씨가 공동 작품을 하나 하자는 제안을 먼저 해 왔다"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주로 이메일을 통해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했다. 당시 은씨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은씨는 "작품에 대해 경제적인 이윤이 나오면, 일정 비율로 배분하는 것은 물론 소유권은 정씨가 갖는 대신 공동작품으로서 두 작가의 이름을 공동으로 명기한다는 합의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메소폴픽 스페이스'라는 작품 제목 역시 자신의 기존 작품에서 따 온 것이며 전체적인 구상도 자신이 했다고 덧붙였다. 구상을 작품으로 구현한 것은 정씨지만, 작품의 원천을 마련한 것은 자신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싸움
하지만 공판 과정에서 정씨 측은 강하게 이를 부인했다. 정씨의 소송 대리인은 "은씨는 작품을 만드는 데 보조 역할을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씨가 금속으로 만든 조형미술품(조각부분)을 창작했고, 이에 바탕을 두고 둘이 공동으로는 컴퓨터 영상만 만들었기 때문에 공동저작물로 볼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정씨 측은 오히려 유명 중견 작가와 함께 작품을 할 수 있는 배려를 해 줬는데, 젊은 건축가가 소송까지 제기했다며 불쾌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고려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럼비아 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은씨는 이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주로 활동해온 신진 건축 예술가다. 반면 프랑스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해 왔던 정씨는 국내의 대표적 여류 조각가로 명성이 높고 경력도 화려하다. 1969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한 정씨는 82년 아카데미 드 파리 주최의 '훼네옹 상' 85년 끄레르몽훼랑 예술 축제 회화상 92년 석주미술상 등 국내외 주요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대한민국 국회 건립 50주년 기념 조형물, 올림픽 성화도착 기념 조형물 등 유명 작품을 제작한 작가이기도 하다.
두 예술가의 공방에 재판부(민사합의11부)의 고민이 깊어졌다. 예술품의 공동저작 여부를 놓고 다툼이 벌어진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데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의 싸움이기 때문에 법적 잣대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소송을 제기한 은씨는 "금전 문제가 아닌 저작인격권의 분쟁"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재판장인 강영수 부장판사는 이에 따라 몇 차례 조정 기간을 가졌지만, 모두 결렬됐다.
결국 상반기 내 법적인 판단이 내려질 듯
두 작가간의 법정 공방을 두고 미술계에서도 주목을 하고 있다. 건축가와 조각가라는 서로 다른 영역의 작가들 간 분쟁이라는 점에서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데 동의를 하고 있다. 한 중견 조각가는 "사실 정씨 입장에서야 건축가를 자신과 같은 순수 예술가로 보지 않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술계 관행상 중견이라 할 수 있는 정씨가 신진이라 할 수 있는 은씨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공동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술작품의 저작권을 놓고 법적 판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 자체가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둘 간의 공방은 다음 달 추가적인 조정 기일을 거쳐 올 상반기 내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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