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스트로(life strawㆍ생명의 빨대)’. 언뜻 보기엔 단순한 빨대 같지만, 오염된 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휴대용 정수기다. 미생물과 기생충의 99.9%, 박테리아의 98.2%를 걸러준다. 이 것만 하나 있으면 배터리나 전기충전 없이도 하루 1,000ℓ 이상의 물을 정수할 수 있다. 1,000명이 먹을 식수가 너끈히 해결되는 셈이다.
라이프 스트로는 덴마크의 기업가 미켈 베스터가르트 프란젠의 아이디어다. ‘착한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이 돈도 잘 번다’는 자신의 경영 철학을 그대로 실현 시킨 ‘착한 제품’인 셈이다. 이 빨대는 제작 당시부터 오염된 식수 때문에 장티푸스·콜레라에 걸려 고통 받는 아프리카 저개발국 사람들을 겨냥했다고 한다.
수도와 전기 등 인프라가 잘 갖춰진 우리에겐 별 의미 없는 것이지만 아프리카 주민들에게는 건강을 지켜주는 말 그대로 생명의 빨대다. 때문에 국제보건기구(WHO)·유니세프·옥스팜·세이브더칠드런 등 국제 구호기관은 물론이고 국내 비정부기구(NGO)들도 이 빨대를 구입해 저개발국에 보급하고 있다.
최근 착한 기술로 불리는 이른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 글로벌 사회공헌의 화두가 되고 있다. 적정기술은 를 쓴 독일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가 1966년 창안한 개념. ‘개발도상국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소규모 기술’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선진국 출신인 엔지니어나 제품디자이너들에게 별다른 주목들 받지 못했고, 1980년대 중반 이후 정보기술(IT)이 각광을 받으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진흙 속에 묻혀있던 착한 기술이 최근 다시 부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첨단 기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 일상 생활에선 때론 범용기술이 더 중요하고, 이 것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지구촌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각성 때문이다.
사실 스마트폰, 노트북, 스마트카 등 이른 바 돈 되는 분야에서는 기술홍수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신기술이 넘쳐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지역적으로 이런 흐름에서 비켜나 있거나, 소외돼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하면서도 복잡하지 않은 기술들은 수 없이 많다. 라이프 스트로는 단적인 사례일 뿐이다. 특정 지역 특정 계층만 잘 먹고 잘 사는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는 기술, 발전과 성장의 그늘에 있는 제 3세계를 위한 기술이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각국의 대학 기업 연구소 민간 단체들이 지구촌 사회공헌에 관심을 갖고 일시적 도움이 아닌 지속적인 혜택제공 방안을 고민하면서 적정기술에 주목하게 됐다”며 “우리에게는 이미 낡은 기술들이 상대적으로 문명의 혜택을 덜 받고 있는 저개발국이나 개발 도상국 주민에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의 대학들이 적정기술연구센터를 세우고 자국의 소외된 지역과 제3세계를 위한 기술 개발을 고민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경우 적정기술을 창의적으로 실험해 보는 디랩(D-Lab)’이란 수업을 개설해 몇 년째 성황리에 운영 중이다.
기업들도 움직이고 있다. 에너지 관리 전문기업인 슈나이더일렉트릭은 인도 등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구촌 오지에 불을 밝혀주는 빕밥(BipBop)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인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전기가 없어 고통 받는 이들에게 불빛을 제공하기 위해 슈나이더일렉트릭 직원은 세계 각국의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다. 전깃불 하나 선물하는 것보다 에너지 기술을 전수하는 게 장기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측면에서 에너지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우리나라에도 국내에서도 정부, 기업, NGO들이 손잡고 적정기술 보급에 열심이다.
우선 삼성전자는 특허청 등과 제휴를 맺고 적정 기술을 공동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특허청이 제공하는 1억5,000만건의 특허 자료를 바탕으로 적정기술을 선별해 개발, 해외 법인을 거쳐 저개발국 등에 전달할 예정이다.
민간구호단체인 굿네이버스도 특허청과 공동으로‘착한 기술’을 활용, 다양한 보급사업을 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캄보디아 가정용 정수기 보급이다. 이 정수기는 굿네이버스가 특허청 연구개발(R&D)특허센터, 국내 정수필터 전문기업인 웅진케미칼 등과 손잡고 내놓았다. 이번에 개발한 정수기는 두 가지 필터 방식을 이용한 것이 특징.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세라믹 필터(1차 필터)로 거른 물은 세탁 등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2차 필터로 한번 더 거른 물은 식수로 쓸 수 있다.
이 정수기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수동으로 작동해 정수 속도를 높일 수 있어 에너지 절감과 정수 속도 면에서 우수하다. 앞으로 굿네이버스와 함께 정수기 보급을 캄보디아 전역으로 확대하고, 주변 국가들까지도 넓혀갈 계획이다.
이 밖에 굿네이버스는 특허청의 도움으로 1년 중 7개월간 평균 영하 38도의 혹한이 이어지는 몽골의 유목민들을 위해 축열기 ‘지세이버'(G-saver)’를 개발해 현지 저소득층에게 나눠 줬고, 망고를 오래 보관하고 쉽게 유통시킬 수 있도록 건조시키는 기술은 아프리카 중북부에 위치한 저개발국인 차드의 기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네팔에서는 흙을 단단히 압축시킨 흙벽돌을 개발해 우기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집을 지을 수 있게 했다.
이성범 굿네이버스 사회적기업사업단 팀장은 “적정기술은 현지인을 위한, 현지인에 의한 기술”이라며 “개도국에서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와 환경도 건강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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